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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신구문화연구회/김승희의 글

이제 k-crafts를 바라볼 때가왔다.

이제 K-Crafts를 바라볼 때가 왔다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금속공예학과 명예교수
 갤러리 소연 대표작가
 김승희

                    
한국의 현대금속공예 교육은 1970년대 초반 소수의 대학에서 학과목으로 채택하면서 시작되었다.

교과과정 편성도 막연하고, 기본 공구와 시설을 갖추는 것조차 어떻게 할 줄 몰라 시행착오를 격기도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는 해외 유학파들의 역할이 매우 필요한 때였기에 필자도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50년이 흐른 현재 한국 금속공예는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와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최근 발간된 책 『Korean Metal Art(김홍자,Komelia Hongja Okim, Schiffer Publishing, 2019)』에는 세계 여러 박물관이 소장한 우리나라의 고대, 신라, 고려, 조선조 문화재들과 더불어 전통기법을 응용한 현대금속공예 작가 120여 명의 작품 250점이 함께 실려서 대학 금속공예교육의 결실을 볼 수 있다. 이 책자에 수록된 현대작가들은 1970년대 이후 대학에서 현대금속공예를 전공한 전문가들이다. 따라서 교육의 중요성과 의미를 깊이 되새기게 해준다.
 
1976년 3월, 필자는 국민대학교 생활미술학과 금속공예 전공교수로 전임 발령을 받았다. 우리나라 미술대학의 커다란 두 산맥, 일명 서울대와 홍대 사이에 금속공예 교육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점을 찍은 시점인 것이다. 
‘금속공예 실기실’이라고 문패가 붙어있는 20평 정도의 텅 빈 퀀셋 건물(Quonset)-함석지붕의 막사 건물-이 필자의 일터였다. 당시 필자는 미국대학에서 금속공예전공으로 미술 석사학위를 3년간 했을 뿐 금속공예에 관한 다양한 현장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작업대와 땜을 할 수 있는 세공 기본 시설과 판금 등 대공을 할 수 있는 모루, 망치 등이 있어야 기초교육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공과 세공 업계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기본 설계도를 완성하였다. 약 450만 원 정도의 금액이 적힌 예산안을 학과장님께 드리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필자 생각으로는 너무나 큰 금액인 것 같아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학과장님이 아무 말씀 없이 본부로 서류를 넘기시는 것을 보고 혹시 숫자를 잘못 보신 것 아닌가 우려도 해보았다. 필자의 예산안은 순조롭게 통과되고 국민대학교 금속공예 실기교육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금속공예 교육자로서 필자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중 미국인 초빙강사를 공채하고 싶다고 교무처장에게 건의하였다. 교무처장은 매우 당황하셨고 어렵다는 말씀만 되풀이하셨다. 국제적인 교류와 외국인 교수 초빙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학교 당국으로서는 신임 교수가 너무 당돌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주거문제 등 필요한 제반 사항을 해결 하면서 외국인 초빙교수 건은 잘 진행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1970년대 중반 국민대학은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고 있을 시기였고 조형대학 설립과 맞물려서 이 모든 일들이 순조로웠기에 필자로서는 ‘때를 잘 만났다’라고 당시 상황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1981~82년 미국인 금속작가 Jack Da Silver, 1983~87년 영국인 작가 Stephan Bort가 초빙되어 금속실기수업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이 두 분 초빙교수는 후일 본국으로 돌아가 대학에 재직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환 교수, 학생간의 국제 교류 사업이 본격화 되는 계기가 된다.

1986년 여름방학을 맞이하면서 필자는 『한·미 금속공예 워크샵(The Korean-American Metal Arts Workshop,1986.6.30-7.3,국민대학교 3호관)』을 주관하게 된다. 우리나라 현대공예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한국과 미국작가들이 함께하는 워크샵과 세미나였으며, 미국 작가 7분이 방한하셔서 실기 시범, 강의, 토론회 등 격식을 제대로 갖춘 국제 워크샵이었다. 당시 실기 공방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은 전공자들과 대학 강사진들이 공식적인 신청과정을 거쳐 수강생으로 참석하였으며, 워크샵은 초대작가들의 실기와 세미나과정에 수강생들의 열기로 가득 찬 혼연일체가 된 모습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국제적인 교류사업으로 각계 사회 인사들의 후원과 관심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故) 이경성 (국립현대미술관장역임), 故) 박계희(워커힐미술관 관장역임), 이영혜(디자인 사 대표) 등도 적극 격려를 해주었다. 금속공예의 든든한 후원사 명보랑(하얏트호텔 샵)과 보만(신라호텔 샵)도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계획 초기부터 함께 의논하고, 초청작가 명단, 참가자 모집, 예산관계, 책자준비, 번역과 통역 등 세세한 부분을 각자 맡아서 효율적인 운영위원회를 이루어 낸 故) 유리지, 김여옥, 김재영, 우진순 작가들의 역할이 성공적 워크샵의 중심에 있었다.



1980년대 초빙강사로 온 Jack Da Silver는 한국의 은수저공방에 크게 관심을 보였고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금속 수저를 쓰는 나라라고 하면서 ‘한국 금속공예 대단하다’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 필자는 실버 교수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 하였다.  밥상의 필수품인 수저를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특별하게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를 선입견 없이 볼 수 있는 외국인들의 안목이 우리 자신의 문화가치를 찾아내는 열쇠 같은 것이었다.

미국인 초빙작가 잭 다 실버(Jack Da Silver)로부터 한국 수저에 대한 특별함을 들은 후, 시간이 지나면서 필자는 주변 국가와는 다른 우리의 식기 문화와 재료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 일본인들이 나무를 깎아 젓가락을 만들 때, 중국인들은 흙을 빚어 숟가락을 구워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당시 첨단 과학 산업인 금속 합금술을 활용하여 금속 수저를 만든 것이다. 용광로를 비롯한 망치와 그 외 도구들이 있었기에 단조기법(forging)으로 금속 수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금속 수저를 쓰는 나라, 그러나 수저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밥 그릇, 국 그릇 등 생활용품과 장식품도 대부분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을 남겨진 유물로서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 최대 중요한 행사인 종묘제례용 제기를 금속으로 제작하였다는 것은 당시 금속장인들의 위상을 입증하는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의례 전시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금속생활용기나 집기가 한국에 훨씬 많다는 것은 우리 공예문화의 특징을 금속과 관련시켜 초기부터 다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필자는 이난영(경주 박물관장 역임)의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2)』 책자에서 고대 금속 수저에 대한 자료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적어도 1세기경 이미 금속 숟가락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유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황해도 황주의 흑교역 동쪽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은 국자 같은 형태인데, 1-2세기로 연대 측정이 된다고 한다.
경주 금관총에서 작은 숟가락들도 젓가락 없이 숟가락만 출토되었다는 것이 특이하게 보이며 숟가락과 젓가락이 처음으로 함께 출토된 것은 공주 무령왕릉 분묘이다.
통일신라와 고려 유물에서는 다량의 숟가락들이 포개어져 있어서 당시의 중요한 교역물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1세기경,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 같은 형식의 토제 숟가락이 중국 정주시 동한묘에서 발견되었다. 형식은 유사하나 재료는 흙인 것이다. 오늘날 중국 도자기 숟가락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이 이처럼 숟가락에 관심이 높은 것은 국물이 많은 음식 문화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맛있는 탕 종류 음식을 먹기 위하여 우리 선조들은 커다란 솥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솥을 만들다 보니 밥 그릇, 국 그릇, 국자, 숟가락, 젓가락도 금속장인의 일거리가 된 것이다. 요즈음 식으로는 금속공예가들의 일자리 창출인 것이다.

다양한 생활용품을 금속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시대의 금속을 다루는 장인이 많았다는 것이며, 금속식기와 집기들을 일반인들이 쉽게 구입하여 사용할 수 있는  그들의 생활문화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전통이 이어져서, 오늘날 우리는 금속 수저를 자연스럽게 대중적으로 쓰고 있으며, 금속수저에 대한 역사적 문화자산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이다. 누구인가 비추워 주지 않으면 자신의 모습을 못 보기 때문이다.

수저에 대해서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서 우리나라 금관도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1994년 필자는 『신라금관의 조형성 연구(국민대학교 조형논총 13집)』를 시작으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한국금속공예의 흐름을 검색하고, 참고 서적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놀라운 사실들을 찾아냈다.
지금까지 초, 중, 고등학교에서 우리나라 문화는 대부분 중국에서 온 것으로 배웠기에 금관도 당연히 중국에서 그 디자인과 기법이 전수된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필자가 연구한 자료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고대국가에는 신라 금관 같은 단조(forging)나 판금 기법(smithing)으로 제작된 것이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우리나라 금관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대부분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들 고대국가에는 신라 금관과 같이 관 전체가 금으로 두드려서 만든 금관이 없다.
중국의 머리장식의 기본구조는 종이로 빳빳하게 둥근 모자형태를 만든 후 섬유(비단)로 감싸고 금사로 짜거나 엮어서 비취, 옥, 산호 등 화려한 보석으로 윗부분을 꾸미는 것이 대부분이다.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후 우리나라도 섬유로 만든 관을 만들었다고 본다. 고대 일본에서는 금관은 발견된 자료가 없으며 AD 16C에 이르러 무사들을 위한 투구를 중심으로 금속관이 나타나고 있다.

『신라 금관의 조형성 연구』에서 필자는 세계의 금관들과 비교하여 신라 금관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데, 기법이나 조형성이 비슷한 것은 메소포타미아 초기 수메르, 또는 이집트, 앗시리아, 스키타이, 에투루리아 등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금관(1세기 것으로 추정)은 신라 금관과 매우 유사한 디자인이다.

『금속공예 동, 서양 교류연구1, 2(국민대학교 조형 논총 22, 24집)』 등 논문을 쓰면서 필자가 확신한것은  신라의 금속공예 기법이나 조형성이 고대 금속문명의 최고 정수를 이룬 메소포타미아 또는 스키타이(Scythia) 황금에서 보여준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국가에서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제작 연대의 차이가 크긴 하지만 국제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매우 궁금하였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배를 타고 온 석탈해가 연금술사이거나 대장장이였다고 하는데, 고대에서 금속공예의 국제적인 교류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부분이다.

석탈해가 가야의 김수로 왕에게 겨루기를 신청하는 장면이 있는데, 박용숙(미술평론가)씨는 그의 책 『황금가지의 나라(철학과 현실사,1993)』에서 이것을 연금술 겨루기라고 묘사한다.
연금술이나 대장기술은 고대에서 권력을 잡기 위한 가장 중요한 비법이였을 것이다. 첨단과학기술을 가진 금속 장인들이 그 시대를 통치한 것이다.

대장장이의 합금술과 제작기술은 힘을 발휘하는 무기생산의 기본이며, 금세공으로는 일반 평민들이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신비스럽게 반짝이는 금관 같은 화려한 장식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 김병모 교수는 그의 저서 『금관의 비밀(푸른역사, 1998)』에서 경주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왕들은 연금술이나 금속공예와 매우 관련이 많고 금관이나 금장신구를 대량으로 제작하며 그들의 세력을 과시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한국은 금속, 중국은 도자기, 일본은 나무와 옻칠이 그들의 주된 생활문화의 재료였을 것임을 입증하는 부분은 재미있게도 그들의 영어 국가명에서 더욱 확실하게 알게 해 준다. 
중국 국가명 China는 소문자 china로 도자기라는 뜻, 일본 국가명 Japan은 소문자 japan으로 옻칠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도자기 수출로 국부를 이루고 북경의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다큐 영상이 생각난다.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중국 도자기를 매입할 때 차이나, 차이나 부르면서 차츰 자연스럽게 중국 국가명이 된 것일까? 일본은 나무가 많고 반면 습도가 높아서 곰팡이와 부패방지로 옻칠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한국 국가명 Korea에는 금속이라는 단어는 없다.

필자는 한국 금속공예의 특징을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인 김씨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고대 국가에서 왕들의 탄생설화에 금속공예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가야의 김수로 왕은 철의 왕국을 다스린 유명한 연금술사인데 금알에서 탄생되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해진다. 신라는 AD 532년 가야를 병합한 이후 적극적으로 금을 사용하였으며, 지배그룹도 박씨, 석씨에서 김씨로 정착되어 왕족과 대부분의 귀족들을 김씨들이 차지하였으며, 그들은 모든 일상용품을 금으로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기획한 신라 황금 특별전 『신비한 황금의 나라 : THE GOLDEN ART OF SHILLA(2001.7.31.~9.9)』에서는 신라 금 장신구류만 약 850여점이 전시되었다. 본 전시에서 보여 지는 뛰어난 세공품의 수준과 발굴된 유물의 양을 생각해 볼 때 당시의 금속공예가 생활 속에 보편화 되었다는 점과 뛰어난 금속공예 장인정신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문헌에서도 신라시대 금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눈이 부시는 금, 은, 채색이 많이 그 나라에 있다. 이를 고금신라국이라 한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세계 문화기행』에서 저자 이희수 교수는 아랍인 이븐 쿠르다드비가 AD 845년에 실린 신라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의 맞은편에 신라라는 산이 많고 여러 왕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금이 많이 생산되며 기후와 환경이 좋아 많은 이슬람교도가 정착했다. 주요 산물로는 금, 인삼, 옷감, 안장, 토기, 검 등이 있다. -

9~12세기 사이 아랍의 지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이자 황금의 나라로 표현한다.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이 너무 흔하다.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신라 왕과 권력은 금 장신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는 왕들의 묘지를 위한 고분 금속공예였다.
당시 신라는 귀족들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난립하고 법 제정 등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국가라 할 수 없는 형태였다. 왕들의 고분군들은 높은 산같이 쌓아 경주시내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민간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했을 듯하다. 이러한 권력구조를 개선하고 왕권을 확실히 다지기 위하여 새로운 사상 이데올로기가 필요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불교가 받아들여졌기에 민간신앙으로 불교가 상당히 퍼져있었다.
AD 528년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이후 지금까지의 고분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은 한꺼번에 퇴조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했다고 본다. 법흥왕 이후 과거와 같은 고분 금속공예 유물이 별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불교의 공인 이후 고분 금속공예는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불교문화의 유입은 그들의 권력 구조에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불교문화의 전개에 있어서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처음 유입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는 그로부터 12년 뒤에 침류왕 원년(384)에 정식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다시 144년 후인 법흥왕 15년(528)에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하였다. 이 기록대로 라면 불교는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로 가는데 무려 160여년이 걸린 것이다. 
고구려, 백제와 비하여 삼국에서 유독 불교유입이 늦어진 것은 당시 금속공예와 연관된 권력층 힘이 단단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상상이 된다.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이차돈의 순교가 가장 영향력이 컸다고 본다. 한국 역사에서 기록된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 그런데 사실은 법흥왕이 금관을 만드는 고분문화 권력을 퇴치시킨 정치적 기획이 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관심은 금관을 만들던 금속공예의 장인 정신이 불교문화 속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나 하는 점이다. 불교문화 도입에 따른 기존 권력층의 와해과정에서 금속공예가들은 어떻게 새로운 문화 속에서 살아남아 있었는가... 그러나 다행히 수많은 불교 용품과 사리 장엄구에서 고분 신라시대의 금속세공술이 다시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금속공예의 뿌리가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어 필자는 금속공예사에 대하여 점 점 더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불교의 유입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크게 변화를 이루었으나, 당시의 금속공예가들이나 그 후예들은 새로운 조형성을 찾기 위하여 금관을 만들 때 사용했던 기법과 디자인을 자연스럽게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2)
 
그림 1) <통일신라시대, 송림사 오층전탑, 고14.2cm 사리기>   
      
그림 2) <통일신라시대, 송림사 오층전탑 금은수형장식, 
고18cm 국보32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당수의 금속공예가들이 수난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금속공예 기술과 장인정신은 그 뿌리가 매우 깊어 불교 금속공예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는 700여년동안 금속공예장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받고 있는 『은제도금연화형주전자(12C 미국 보스톤미술관 소장)』등 수많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불교용품을 제작하였다. (그림 3)

그림3)은제도금연화형주전자    미국 보스톤미술관 소장      
 
그림 4) 37.5 x 12.9 x 9.8
국보 9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 유물에서 보여 지는 금속공예품은 다음과 같이 대별된다. 
불상, 동종(銅鐘), 향로(香爐), 초두(鐎斗), 사리함(舍利函), 금고(金鼓), 정병(淨甁), 다층소탑(多層小塔), 요령(搖鈴), 청동추함, 쟁반, 주전자, 받침잔, 촛대, 금속항아리, 장신구, 침통, 장죽걸이, 수저, 동경, 불교조각 장식판 등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금속재료와 기법이 응용되고 발전하였다. 
그들은 기물의 표면에 부조적 입체감을 주는 은입사기법과 돋을새김기법의 혼합을 이루는 표면장식기법의 창작자로써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연화형주전자뿐 아니라, 『청동은입사포유문쟁병(12C,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과 은입사기법의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4)
최순우(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는 그의 고려청자 편련(국보6 예경산업사 p181,1983)에서 고려시대유물을 살펴 볼때 청동제가 주를 이루고 있었고 청동제 상감기법의 디자인을 청자상감으로 유사하게 제작 하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불교용품의 형태와 표면장식은 금속장인들이 주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본다.

1995년 7월 15일 삼성문화재단의 호암갤러리에서 『대고려국보전-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 전시회가 열렸는데, 260여점의 고려유물들이 전시되는 한국 최초의 대규모 고려국보전이였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불화, 전각, 서화, 나전칠기, 청자, 금속공예의 총 260여점 중에 170여점 가까이가 전부 금속공예품이었다는 것은 금속공예가인 필자에게는 너무나 반갑고도 충격적인 전시였다.
도록 『대고려국보전(삼성문화재단,1995)』의 인사말을 통하여 故)이건희(당시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역임)는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하여 우리문화 유산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본 전시회를 기획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국내에서 소장되어 오던 수많은 명품들을 비롯하여, 일본의 중요문화재 10점 등, 해외에서 온 26점은 대부분 국내에 처음 공개하는 작품들이었다.
세계최고의 기업을 이끈 지도자 이건희 대표는 우리국민들이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그 은혜로움을 깨달지 못 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본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그의 생각과 의지로 열린 전시는 문화예술계와 국민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가 연구한 바와 같이 고대 금속공예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나가 통일신라에서 꽃을 피우고 다시 고려시대까지 퍼져나간 것을 확인하는 중요한 전시회였다.
불교문화에서 필요로 하는 수많은 공예품이 금속으로 제작되었다는 현장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전시였다.  신라 고분시대 권력층과 깊게 관계하고 있던 금속공예가들은 새로운 문화적, 시대적 요구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뛰어난 금속공예 문화유산을 지금 우리에게까지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불교용품이 금속으로 제작되는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에서 금속장인들은 인류문화 발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금속활자를 발명하게 된다. 당시의 금속장인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도전이 였다고 본다. 가로24 세로 약70센치인 목판인쇄본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금속활자로 제작했을 때 대부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습도등에 무관한 가로,세로 약1센치의 금속활자를 발명하기 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격었을 그들 금속장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배불숭유정책으로 지금까지 금속공예의 배경이었던 불교는 유교로 그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유교는 인간의 도리를 가장 우선시하는 생활철학이었기에 금속공예는 좀 더 민중적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시대에는 『음양오행』과 『삼강오륜』에 기초한 생활문화의 전성기였다고 본다. 금속공예가들의 역할은 왕권중심에서 양반중심으로 바뀌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택설계 시 남과 녀의 주거부분은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고 담으로 가려져 있어 쪽문을 열어주어야 남녀가 출입할 수 있다는 당시 생활문화 현상들은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선비들은 사랑채에서 지필묵으로 지칭되는 『문방사우』와 더불어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며 풍류를 즐기는 고급문화를 향유하면서 그들을 위한 금속공예 명작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선비용 금속공예로는 문방구(필기, 연적, 붓꽂이)와 장죽, 담배함, 책장, 촛대, 남성용 갓 장신구등 다양하다. 특히 철제은입사기법은 가장 뛰어난 기술로 인정되었다.

또한 동(79%), 아연(19.7%), 주석(1.3%)의 합금 유기그릇의 방짜 기법이 넓게 퍼지면서 일반인들의 식기, 수저, 주전자, 술잔, 술잔대, 촛대, 화로, 신선로, 세면기 등 생활용구와 제기 및 향로 등이 폭넓게 제작되었다. 

조선 왕실의 최대 연례행사인 종묘 제례 시 대부분의 제기들이 금속 유기 제작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시대 금속장인들이 무척 바쁘게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의 금속 장인들은 고분시대 금관, 금장신구 등을 제작한 기초기법의 바탕 위에 고려시대 불교문화를 통하여 섬세한 표면장식기법을 개발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교 용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기법들은 조선왕실 종묘제례 용기를 포함한 일상용품 제작으로 한국 금속공예의 역사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대의 사상과 정치권력의 요구에 발 맞추어서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1909년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금속공예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한성미술품제작소』는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로 개칭되어 금속공예는 기법과 용도에 따라 주금, 단금, 보석, 조각, 입사, 두석 6개 공방으로, 전체 11개 공방(나전, 목공, 제묵, 도자, 염직 포함)에서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에서는 일본을 통하여 서구적인 디자인과 세공술도 도입되어 서양문화유입의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한국의 금속공예는 그 맥이 잘려지는 시련을 겪게 된다. 한국의 유기그릇들은 일본의 대포나 총알의 재료로써 공출되어 많은 숫자가 녹여져 버리고 일반 가정집에서 쓰고 있는 작은 수저까지 모두 공출할 정도로 한국 금속공예의 많은 자료들이 녹혀 없어진 것이다. 
비록 일제 치하에서 많은 자료들이 녹여 지고 분실되었으나 오랜 역사와 함께 살아있던 금속공예전통은 회복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명의 싹이 힘차게 트고 있다고 본다. 

해방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국가의 토대를 갖추면서 70여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서구적 교육제도가 빠르게 정착하였고 오늘의 금속공예는 대학교육의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고 본다.



2008년, 호주 금속공예단체 ‘Jam Factory(호주 Adelaide)’에서 필자에게 국제 컨퍼런스 발표자로 한국금속공예에 대한 특강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필자는 ‘때가 왔다’라는 심정으로 강의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주제는 필자가 그동안 연구한 『한국 금속공예 과거와 현재(The Past and present of Korean Metal Craft)』로 정하였다. 강의 내용이 2000년 금속공예역사를 담은 것이기에 방대하다고 볼 수 있는데, 주어진 시간은 단 50분이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안 쓰던 영어로 시간을 조절하면서 연습을 반복하였고, 필자의 강의는 성공하였다고 생각한다.
강의를 한 지 약 4년 후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뮤지엄(Powerhouse Museum)에서 한국금속공예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대규모 전시가 이루어졌다.

『장인정신-한국의 금속공예(Spirit of jang-in: Treasure of Korean Metal Craft exhibition)』 특별전(2011.10.27~2012.2.18)은 필자로서는 너무나 영광스럽고 그동안 한국금속공예 연구에 대한 보답이었다고 본다.

전시기획은 김민정 (파워하우스뮤지엄 동양미술부 큐레이터)씨가 2008년 'Jam Factory 국제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필자의 특강을 들었던 것이 많은 참고가 되어서 한국 금속공예 전시회를 호주에서 열고 싶다는 뜻을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건의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초 국립중앙박물관측은 국보급 문화재 해외반출 사례가 없어 파워하우스뮤지엄 요청에 난색을 표명했지만 한ㆍ호 50주년인 점을 고려, 고심 끝에 반출을 허가했다.

김민정씨는 "한국과 호주 수교 50주년을 맞아 양국간 철광석 무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금속공예전을 기획했다"며 "호주인들에게 한국 금속공예 및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한국 문화관광부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성공적인 큐레이터의 활동을 호주에서 인정받아 김민정씨는 2012년 국제박물관협의회 호주지부(ICOM Australia)에서 ‘Award for International Relations’을 수상 받았다.

『장인정신-한국의 금속공예』 특별전은 고대 한국 청동기, 철기, 금관 등 국보급 유물 10점을 비롯해 현대 21세기 젊은 작가 작품까지 총 161점, 한국 금속공예의 과거와 현재를 한 전시장에서 볼 수 있게 역사적 배경 설명을 상세히 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금속공예에서 현대 작품까지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기획된 적이 없기에 필자는 그 의미가 각별하다고 본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자 하는 것도 현재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금속공예 작업들이 우리의 전통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986년 『한,미 금속공예 워크샵』이 계기가 되어 한국 금속공예 작가들도 미국으로 초대되어 다양한 워크샵이 진행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전통기법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채널이 생긴 것이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 작가들은 1992년 미국 SIUE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at Edwardsville), 볼링그린대학(Bowling Green University) 워크샵(1988년)등에서 우리나라 전통기법인 오동상감기법과 금부기법을 소개하였다. 그 중에서 금부기법은 매우 큰 반향이 있어서 지금까지 한국을 알리는 대표적 금속기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필자가 금부기법을 알게 된 것은 우연히 만난 전통은수저 장인 덕분이다. 수저를 만들고 나서 마지막 장식 작업으로 얇은 금부판으로 壽福문양을 넣게 되는데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그림 5, 6)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기법인 것이다. 수저를 만드는 전통장인한테서 금부기법을 배우게 되어 이 기법을 응용 하면서 필자의 추상모더니즘 계열의 장신구가 탄생하게 된다.



그림 5) 고려 12세기 은 침통(중앙박물관 소장) 
*필자가 금부기법이라고 추정하고 있음
그림 6) 금부기법이 들어간 은 수저


한국의 금부 기법은 은제품 표면에 얇은 순금 판 문양이 부착되는 기법으로 노란색 금과 백색  상감 효과가 돋보이는 기법이다. (금박 기법과는 차별되며 1000배 정도 두껍다. 금박은 0.1미크론[micron]이고 금부는 100미크론[micron]이다.)

고려 시대의 불구 용기나 은수저 등에 금 문양 상감이 금부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생활용구나 은 수저에도 금 문양이 금부 기법으로 많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금부 기법은 현재 미국이나 유럽 국가의 금속공예 작가들에게 알려지면서 한국 금부기
법을 활용한 현대 작품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2014년 3월 호 미국 잡지 『 Lapidary Journal for Jewelry Artist 』에 기고된 한국 금부기법(Keum Boo in Korea)은 서양의 현대작가들이 금부 기법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한국 기법에 대한 존경심과 선호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들의 금부 작품들은 서양인들의 조형감각으로 금부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하는 좋은 예시가 된다.

한국 기법을 통하여 외국 작가들과의 교류가 좀 더 활발해지고 한국 작가들이 인정받을 수 있
는 통로가 될수 있다. 한국 고유의 기법을 통하여 한국 금속공예가들의 세계화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전통기법이 갖고 있는 고유성, 기법의 우수성, 조형적 표현방법들은 현대 금속공예가들에게는 커다란 자산으로써의 의미가 깊다.

특히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정보화 시대에는 우리 고유의 전통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창의적 활동의 가치는 무한한 것이라고 본다.

도정미 작가는 현재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면서 호주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의 작품을 고가의 작품이며, 컬렉션 하는 것도 예약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금속공예학부를 졸업한 후 전통공예관에서 익힌 은입사 기법을 현대적인 조형성으로 과감히 활용하여 성공적인 작가가 되었다고 본다. 결과적 세계로 진출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전통기법이 근간이 된 것이다. (그림 7,8)

그림 7) Symphony, 도정미

Material: steel, stainless steel, fine silver, fine gold, sterling silver
size: Approx. 28H x 20W x 20cm
Photograph by Terence Bogue
2009  The Arts Centre Maxwell and Merle Carroll Silver Collection, The Arts Centre, Melbourne, Australia

그림 8) Object Container, 도정미

Material: copper, Gilding metal, steel, fine silver, fine gold, wood
Size: H150 x W160 X D100mm
Photograph by Terence Bogue




금속공예 전공자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명성 있는 대공 분야 국제전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첫 수확은 2007년도 독일 하나우(Hanau)가 주관하는 『실버트리엔날레(Silver Triennial)에서 35세 이하 젊은 작가 부문 1등 상을 수상하는 등 젊은 작가들이 세계로 진출하고자 하는 도전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근래에는 장신구 세공 분야에서 반가운 수상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매년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국제수공예박람회』를 통하여 공모하고 있는 『Bavarian State Prize(공예분야에서 국제적으로 매우 명예로운 상)』를 수상한 작가도 나왔고, 본 박람회에서 주최하는 30세 미만의 젊은 신인 선발대회 『Talente』에서도 한국 금속공예 전공 학생들이 꾸준히 선발되고 전시회에 참석함으로써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수집가들의 찬탄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 매년 열리는 『A.J.F(Art Jewelry Forum)』에서도 ‘Young Artist Award Finalist’로 한국 장신구 작가들이 해마다 선발되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현실이다.

2019년, 2020년 루이비통에서 기획한  국제 공예공모전 『LOEWE Craft Prize』의 Finalist로 한국의 고희승과 조성호 금속 작가가 선정되었다.

위에 나열한 국제공모전 외에도 많은 공모전과 초대전에서 한국 금속공예가들은 그 뛰어난 제작기술과 조형성을 인정받고 있다.

필자는 오늘의 젊은 금속공예세대들이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한국 금속공예의 뛰어난 공예 기술과 저력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그 연결점에서 한국금속공예의 내일을 매우 희망차게 바라본다.

한국 금속공예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우리 역사 문화속에 잠재된 저력이 바탕된 현대교육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한국의 젊은 금속공예 작가들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서구적 기법과 조형성에 영향을 받고 있지만  한국적 공예 정신의 특성을 바탕으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독창적 작가정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필자는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이제는 정보화시대에 필요한 적극적인 교육혁신으로 미래의 경쟁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현장에서 우리의 모습을 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지도하면서 동시에 타문화를 융합하는 창의적 시도를 다양하게 열어주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가치를 토대로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K-Crafts 창작하고 생산할 수 있는 공예인들을 길러 낼수 있다고 자부하면서 한국의 공예가 한국 문화의 꽃으로 과거의 영광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 때가 왔다’고 본다.

정보화시대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실감 하고 있지만 지난 50년간 성공적 공예교육을 이루웠듯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본다. 
때마침 BTS를 비롯한 K-Culture가 세계인들의 공감을 받고 있어서 K-Crafts도 곧 최고라고 감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2021년 한국 최초의 공예 박물관인 『서울공예박물관』이 한국 최고의 문화거리에 개관된 것을  ‘최적의 때가 온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과거와 연결된 오늘, 그리고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구심점으로 우리의 것을 세계화 해서 K-Crafts의 꿈을 현실화 할 수 있는 『서울공예박물관』이 되어줄 것을 희망한다.



-完-
    
2021 12/22.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