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금속으로 만든 그림,
금속공예•디자인작가, 김승희 국민대 교수
금속공예•디자인 작가
우리 민족은 솜씨가 좋다. 신라 시대 무덤 속에서 출토된 왕관과 팔찌, 목걸이 등을 보고 세계인은 놀랐다. 젓가락으로 콩알을 집을 수 있을 만큼 섬세한 사람이 바로 한국 사람이다. 국민대 김승희 교수는 금속 공예디자인 작가로 한국 전통의 미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해왔다. 그의 작품은 잠재 의식 속의 기억을 형상화한다.
김승희 교수는 이른바 '사모님'들 사이에서 김승희의 브로치 하나쯤은 달아야 안목을 알아준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장신구나 주얼리 디자인으로 대중적인 금속공예가다. 동시에 그가 40년간 교수로 지내면서 길러낸 제자의 수 만큼이나 금속공예 학계에서 미치는 영향력도 크다. 김승희 교수의 작품이 입소문이 난 건 1980년대부터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금속공예를 연마하고 돌아온 몇년 뒤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상, 명보랑에서 부탁을 받았어요. 한국 전통 식기 특별전 의뢰였죠. ‘5월의 만찬’이란 주제로 반상기·구절판·찜기·촛대·은수저 등을 제작해 내놨죠.” 83년의 일이다. 작가의 작품이니 평범한 모두가 소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단다.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부 계층이 고객이 됐다. “청와대의 연락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다. 그렇게 ‘사모님’들 위주로 ‘김승희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 작가는 “은수저 등을 만들며 미국 유학 시절의 ‘황당함’이 떠올랐다”고 했다.
“우리나라 대학에선 디자인만 하고 제작 같은 것은 청계천 대장장이를 찾아 가서 하는 게 보통이었어요. 망치 들고 금속을 연마해 직접 두드려 만드는 것 말이죠. 그런데 인디애나 대학원에선 2㎏짜리 망치를 쥐어주면서 직접 작업하는 방법을 가르치더군요. ‘여기까지 와서 내가 왜 이런 험한 일을 해야 하나’ 싶었죠. 한데 나중에 실제 작업에선 그때 받았던 교육이 큰 도움이 됐어요.”
초등학생이던 두 아이를 키우며 대학 교수로, 생활 공예 제작자로 사는 건 쉽지 않았다. “주문은 밀려들고 작업은 많아졌죠. 그래서 아예 은기 공방을 차렸어요.” 생활 공예로 상업화에 성공했지만 그는 여전히 순수 예술가임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87년 ‘하염없는 생각’이란 주제로 작품전을 연 그는 “그릇을 하도 만들다 보니 ‘밑 빠진 그릇’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며 웃었다. 이 전시에서 선뵌 것은 단지 모양을 한 브로치였다. 진짜 단지라면 밑이 막혀 있었겠지만 그는 액세서리 브로치를 밑 빠진 단지 모양으로 제작했다. “은기도, 금속 공예 작품도 실제로 전시를 구경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소수였죠. 전시 공간도 몇 없었고요. 은기 고객들이 이 브로치를 알아보고 하나 둘씩 주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제 브로치디자인이 유행이 시작되자 남대문 액세서리 상가에선 제 작품을 그대로 베낀 게 쏟아져 나오기도 했고요. 제 작품이 ‘남대문의 티파니’라고 불린다니까요. 요즘 작품들도 여전히 복제한 제품이 많이 팔린다고 하대요.” 그의 작품이 은으로 돼 있다면 남대문 버전은 주석이나 도금으로 돼 있다. 가격은 100분의 1 수준이다. “모조품이 신경 쓰이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다른 걸요. 그리고 얼마나 잘 만들어내는지 몰라요. 인기 있다니까 뭐. 하하."
은을 연마해 예술적으로 변신한 브로치는 이후 오닉스, 호박 등 귀금속 소재 브로치로도 발전했다. 미술평론가 이재언씨는 김 작가의 브로치를 두고 “시적이고 풍경적인 조각으로 금속 조형을 해 왔던 작가의 ‘미니어처 조각’”이라고 표현했다. 마치 한 점의 작은 동양화가 그려진 듯한 그의 브로치에 대한 평이다. 김 작가는 “평론가들이 ‘내 가슴에 꽂는 산수’라고 표현하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산과 자연을 소재로 삼았던 조각 작품이 브로치란 영역으로까지 넓어진 거니까요. 가슴 한 켠에 달려 있는 자연, 우리 산수라는 표현이 정말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김 교수는 여성들이 브로치를 활용할 때 “이야기가 있는 상징물임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브로치만 300개를 넘게 가졌다고 해요. 그리고 그날 그날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맞춰서 브로치를 활용했다고 하죠. 브로치는 그런 장신구예요. 작은 데도 크게 눈에 띄는 소품이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를 어떻게 드러내고 싶은지 고려해서 브로치를 선택하고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김 교수는 '미술가', '조각가'라는 호칭보다는 하위 단계로 여겨지는 '공예가'로 살아가는데 대해서는 뚜렷한 소신을 드러낸다.
"작은 것을 만들 수 있으면 큰 것도 만들 수 있습니다. 공예에서 연마한 조형기술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커다란 조각과 평면부조, 구조물도 가능했습니다."
그는 1987년 밑 빠진 그릇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공예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말한다. "그릇을 만들 때면 습관적으로 물을 부어보고 물이 새지 않는지를 확인했죠. 그러다 문득 더 이상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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