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큰 이야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신구 예술이 위축되거나 금지된 경우는 거의 없다. 동기나 양식, 재료, 기법 등이 차이는 있어도 장신구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욕구와 미의식 그리고 삶(개인적이든, 혹은 사회적이든) 속에서의 다양한 동기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조형 장르이다. 조형 영역에서 가장 섬세하고 작으면서 심지어는 의존적이기까지 한 장신구 예술이, 사회 전역에 걸쳐 일어나는 패러다임의 대 전환에 직면해 있는 지금도 나날이 비중을 더해가면서 그 독자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은 그리 단순히 볼 일이 아니다.
많은 예술형식이 있지만 장신구 예술만큼은 인간과 밀접하게 밀착하여 미적(표현적), 장식적, 사회적, 인격적, 교양적, 주술적, 소유적 차원 등의 다양한 동기를 가지는 형식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착용자의 모든 움직임과 관련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연속적이고도 유기적인 의미소意味素로서의 장신구는 작으면서도 가장 역동적이고 큰 반향을 불로 일으키는 예술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생명력을 갖는다.
어느 예술양식이나 동시대인들의 다양한 취미와 욕구를 만영하고 있지만, 장신구만큼 시대적 감성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도 드물다. 일견 독립적이기보다는 의존적이고 부가적인 형식와 비교적 작은 작품의 크기 때문에 잘 주목되지 않지만, 조금만 가까이 살펴보면 장신구는 대단히 다양한 조건들과 요소들이 결합한 세계이다.
소유자나 착용자의 독특한 취미와 미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으며, 또한 작가 특유의 개성과 표현으로 말미암아 장신구는 '작은 우주'라 불릴 만한 다양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 장신구 조형이 최근 들어 더욱 다양해진 것은 장신구에 대한 다변화한 해석과 실험들에 기인할 것이다. 장신구를 의존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고 더욱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면을 조화시키려는 태도가 학구적인 작가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금속조형 작가 김승희는 우리 금속조형과 장신구 조형에 현대적 계기를 분출시키면서 자율성과 표현성을 확산시킨 주역이다. 지난 1980년대 시적이며 풍경적인 조각으로 금속조형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바 있는 작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조각적인 장신구에 몰도 하면서 특유의 '김승희류流'를 창출해나가고 있다. 근성과 에너지, 탁월한 조형감각 등에서 그의 위상은 공예계만이 아닌 미술계 전체를 통하여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조형세계는 삶과 예술의 유기적인 연석성과 통일성을 회복시키고, 아울러 악의적으로 구획되고 있는 장르를 초월하여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여러 면에서 두루 고양할 수 있는 조형의 모토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필하고 있다. 그의 조형세계는 조각적인 볼륨의 배수와 변형기하학적인 구조를 통한 풍경과 서술성, 풍부한 색상의 회화성 등이 결합한 퓨전 조각이다. 1980년대 작품들은 주로 동銅계통의 금속재와 상감象嵌 등의 가공 기술과 기법이 조화되어 금속의 물성物性을 밀도 있게 탐구하는 표현을 주로 하였다.
1990년대 접어들어서는 더욱 대담하고 강렬한 구조와 색상의 작품으로 탈바꿈한다. 1995년에 있었던 석주미술상 기념전에서 보여준 그의 작품들은 조각이나 회화에만 익숙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퓨전 작품의 실상과 그 무한한 가능성을 널리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의 조형은 공예가 아닌 공예, 즉 새로운 비전의 공예를 선포하였으며, 부당하게 구획되고 있는 장르의 벽을 허무는 중요한 기원을 마련한다.
작가가 근래 보여준 '김승희류流'의 장신구 작품들은 미니어처 조각'이라고 불러 마땅한 메스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종래 그가 퓨전 조형에서 선보였던 동기나 개념들이 옮겨오면서도 장신구 특유의 밀도와 정밀성을 자연스럽게 미감의 조건으로 변모시키는 주술사 같은 힘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지속되는 요소가 바로 프레임 같은 격자구조들이다. 물론 다양하게 변형되고는 있으나 그 격자구조는 창이나 오던 육면체 공간을 연상시킨다. 만약 이것을 창窓이라 읽는다면, 어떤 공간과 공간 사이의 열리고 닫힘이 교차하는 묘한 지점으로 장신구의 텍스트를 대입해 보았을 주체와 객체 간의 상호 작용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객체의 입장에서 그 프레임의 안과 밖을 유심히 주목해본 사람은 굳이 풍경적인 서술이 없어도 만은 장면을 상상적으로 읽어내게 될 것이며, 그 투명성에서 바로 마음과 마음의 교감을 열어가자는 명제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장신구 작품들은 장신구다운 크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보여주는 경험의 강도나 진폭은 의외로 크다. 작은 크기의 미적 대상이 커다란 크기의 대상와 대등한 경험을 유지하기 위한 자신만의 처방이 준비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최소화된 형식 요소와 조건들을 보다 대비적으로 구성하며, 또한 재료가 가진 물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대비적 구성은 한정된 형식 속에서도 조출된 물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재료 자신이 말하게 하는 여지를 넓혀 놓고 있다.
바로 이러한 대비적 국면은 매스와 선, 밀도의 높음과 낮음, 금속과 돌(보석), 기하학적인 것과 비非기하학적인 것, 돌끼리도 색과 성질이 다른 돌의 대비가 무한대의 조합을 생성하고 있다. 다양하고도 신비한 빛을 내는 사파이어, 루비, 마노, 토파즈, 청옥, 자수정, 백수정 등의 보석들이 가급적 원래 모양으로 쓰이거나 원석이 갖고 있는 얼이나 이물질이 있는 대로 세팅하는 것도 종래의 주얼리 작품들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고도의 가공으로 보석은 그것의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 물성에서 직접 발현하는 원석原石의 깊고도 신비로운 빛을 상실되고 마는 것이 흔히 보는 보석의 실상이다. 물성이 스스로 말하게 되는 마는 것이 흔히 보는 보석의 실상이다. 물성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은 장신구 자체가 착용자의 연출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소意味素를 상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장신구를 정지 상태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같이 다양한 상황에 따른 경우의 수가 무한대에 이르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작가는 장신구를 반드시 착용만을 전제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실용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공간과 대상들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실용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공간과 대상들을 해석하고 연추라는 문제에 보다 진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장신구 작품을 ‘미니어처 조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름이 조금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이 무슨 조각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서도 아닐 것이다. 다만 작가의 작품들이 옷이나 사람의 피부를 전제로 한 것만은 아니며 독립성과 자율성이라는 명제를 위한 하나의 차용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 E. F. Schumacher의 명제는 이제 정치경제학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현대미술이 한동안 거대화를 추구하고, 현대미학이 거대담론discourse과 서사narraative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때, 그 거대화의 그림자들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경제적 거대화의 폐단과 비교하여 덜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술작품의 작품은 그만큼 인간적이라는 의미이다.
장신구는 사람의 인격과 활동에 동반하여 더욱 큰 가치 창출을 할 수 있다. 물론 장신구가 화려함이나 사치의 대상이라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속물적 보석 취향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장신구 예술의 본질이다. 장신구 예술은 재료들을 사욕하여 또 하나의 값진 대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조각이 단순히 자연의 돌을 빛나는 또 하나의 세계로 거듭나게 하는 것처럼.
이재언 - 미술평론가,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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