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시정詩情 : 단순한 구성과 추상의 미학으로 빚어낸 장신구의 예술성
대비적 관계성에 관한 금속조형
공예화랑 크래프트하우스에서는 개관 10돌을 맞이하여 김승희 장신구전을 열었다. 김승희의 이번 장신구들은 ‘정물 - 풍경’ 이라는 주제로 발표되었다. 크게 보아 이번 김승희의 장신구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조형적 변주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인다. 하나는 시각적 일루전Illusion에 근거한 입체적 형태의 변형을 통한 정물-브로치 시리즈, 다음으로는 투명한 공간 연작에서 보였던 선과 면의 구성적 관계에 천착한 돌과 금속의 조합적 구성으로서 브로치 끝으로 자연석의 천연 색채와 형태적 특징에 주목하여 아상블라주assemblage적 요소가 강한 최근작 브로치이다.
금속공예가 김승희 작품 세계의 특징을 일견하면, 아무래도 끊임없이 분출되는 창조적 에너지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 창조적 에너지는 다양성, 실험성, 예술성과 같은 문맥들과 적극적으로 조우하면서 공예의 실용적 지평을 넘어서 예술적 평가의 극점에 다다르게 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작품의 실용성을 배제한 순수조형성 내지는 오브제성에만 치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김승희는 그러한 간극들이나 경계적 구분을 뛰어넘어 회화, 조각, 공예의 장르 교차적 지점에서 예술적 힘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승희 작품을 관통하는 ‘대비적 관계성contrastive relationship'은 중요한 작품 해석의 준거가 되고 있다. 이 대비적 관계성은 조형적 문맥에서만이 아니라 글의 삶과 세계관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예컨대 선과 면, 금속과 돌, 금속이나 재료 자체의 고유한 색감과 인위적인 색채와의 대비, 자연성과 인위성 등은 조형적 문맥들 속에서 쉽게 발견되는 대비적인 여서들이다. 이러한 대비적 관계성은 그의 삶의 반경에서도 여실히 읽혀지며 그것 또한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고 보인다. 즉 여성으로서 아내, 어머니, 작가, 교수, 화랑 설립운영자와 같은 다기多技한 자신의 역할을 소리없이 그러면서도 모나지 않게 조화시켜나가고 있는 그의 일상은 하나의 예술적 다큐멘터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전통과 현대, 응용미술과 순수미술,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 등과 같은 상반적 관계성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이를 작품 속에서 볼 때 미국에서 공부한 금속공예의 기법을 한국 전통공예기법과의 접목을 통해 산을 소재로 형상화한 작품들이나 민화적 모티브를 현대적 조형 어법으로 번안한 일련의 시도, 투명한 공간 연작에서 시도되었던 회화적, 조각적 표현들에서 보인 오브제성의 극대화 등은 이러한 가시적 실체들이다.
회화와 조각, 공예의 경계 너머
김승희의 작품 세계는 이른바 대공과 세공, 기물과 오브제, 심미성과 실용성, 회화적 구도와 조각적 공간 등을 동시에 아우르면서 금속조형의 모더니즘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모더니즘적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조형상의 규범, 형식성, 외연外延, denotation과 내시內侍, connotation 상의 단일한 구조와 같은 모더니즘의 의미 체계와 상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녀의 작품이 지닌 외연적 특징은 추상표현주의적 요소와 구성주의적,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넘나들면서 이를 금속공예의 방법론 적으로 조율해 온 점을 들 수 있다. 초기의 <산> 연작들이 추상표현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였다고 본다면, 이후 민화를 모티브로 한 <투명한 공간>과 풍경 연작들은 입체적 아상블라주로서 구성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었고, 이후 장신구를 통한 <자연의 율동>시리즈들은 보다 재료 그 자체의 물질성과 천연성에 천착한 미니멀리즘적 요소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승희의 작품 경향을 넘어 하나의 성향이나 사조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표현 성향을 띄고 있으며 나아가 이번 정물 - 풍경전에 발표된 장신구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보인다. 특히 앞서 얘기했던 세 가지 방식의 조형적 변주들은 가기 개성적인 음률을 들려주면서도 전체적으로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듣는 듯한 하모니를 느끼게 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김승희만이 지닌 탁월한 조형 감각과 시대를 읽어내는 예술가적 통찰력이 한데 어우러지며 빚어낸 시적 상상력의 아우라aura때문이 아닌가 한다.
특히 이번 정물-풍경전은 몇 가지 측면에서 특징적인 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정물이라는 소재 선택의 문제이다. 최근 들어 정물에 관한 기획전들이 메이저급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열리면서 정물의 문제를 새삼스럽게 상기시켜준 바 있다. 정물화나 표현 대상으로서 정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왔다기보다는 작품의 습작이나 소품으로서 가치 혹은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로 불리며 한담여정閑談餘情이나 문인적 기품을 드러내는 표현적 소재였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현대미술 속의 정물화는 이미 소멸된 것과 같은 느낌의 고루한 표현적 영역으로 밀려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물still-life'이 다시 우리의 시각예술 속에서 새로운 기운을 조성하는 것은 아무래도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동적인 시대의 흐름 속에서 회고적 노스탤지어를 그리워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발현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정물은 하나의 움직이지 않는 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오브제적 의미 관계를 발견해내려는 시도와 밀접한 연관성을 짚어보게 한다. 사실, 김승희에 있어서 정물-풍경전의 의미는 장신구가 가진 본래의 기능, 즉 동적인 움직임 속에 회화적·조각적 요소로서의 장신ㄴ구의 대상성이 가질 수 있는 물아일체物我一體적 감성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자면, 장신구를 착용한다는 행위가 이미 움직이는 오브제로서 기능을 예정하고 있으므로, 이에 부합하는 정적인 풍결을 심미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의 표현 의도의 반영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동적 행위와 정적 사물이 만나는 지점에 정물-풍경으로서 브로치는 우리의 시간적·공간적 환경에서 새로운 주객일체, 물아일체의 상황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조형적 측면에서 그녀의 정물-풍경들은 화병에 꽂힌 꽃이나 식물, 작은 사각형 위에 올려진 오브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잔 위에 들어있는 과일과 주스의 빨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케이크 위에 오른 예쁘장한 장식들을 유추케 하는데, 이들은 그릇이나 사각형의 변형을 통한 시각적 환영을 전해준다. 평면화한 입체적 도형 속에 조합된 여러 가지 형태들은 마치 공간 속에 부유하듯이 떠있어 보이거나 혹은 살아있는 식물의 생명력이나 어떤 움직임의 순간적 포착을 읽게 해주고 있다. 이는 대체로 단순한 형태의 조합적 구성으로서 금속의 아상블라주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이와는 다르게 금속과 자연석을 결합한 브로치들에서는 보다 선과 면의 대비, 색채의 대비 혹은 실實공간과 허虛공간의 자아내는 공간적 질서들이 우리의 시각을 자극한다.
이러한 유형의 장신구들에서는 기하학적 추상성과 대비적 과계가 순환적 연결성을 확보하고 있다. 상하 관계나 서로 어긋나 보이는 앞·뒤의 문제가 투명한 공간 속에서 상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구도로 짜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승희의 정물-풍경전은 작가의 일관된 대비적 관계성의 문제가 현재에도 주요한 문맥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 더욱 단순화하고 추상적인 형태에서 자연의 시정詩情과 대비적 관계들의 조화를 함축적으로 내시內示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석과 금속의 협주곡
이전 정물-풍경전에서 김승희의 새로운 작품 경향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석을 조합한 브로치에서 찾을 수 있다. 주로 옥이나 자연석을 사용하여 그 색채적 대비나 자연 자체의 질감에 주목한 장신구들은 일견 자연석과 금속의 협주곡이라 부를 만하다. 호박과 같은 자연석의 경우 자연적으로 생성되면서 그 내부에 새겨진 무늬들은 자연의 싶은 숨결과 시간적 궤적들을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석의 색채, 질감, 내부의 결, 표면의 흔적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가급적 평면적 형태로 조율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장신구가 값비싼 금속이나 보석을 통한 환금성의 가치에 치중했던 것에서 벗어나, 자연의 표정 그 자체를 예술적 승화시키는데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작가 가음의 장신구 미학을 엿보데 하는 점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조형적 감각과 구성적 관계를 조율하는 태도는 이 자연석을 아상블라주하는 작업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김승희의 이번 정물-풍경전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희열은 장신구 작품 자체가 발현하고 있는 자련의 시정 못지않게 샵과 갤러리를 겸하고 있는 전시공간을 새롭게 구성한 디스플레이 감각에서 맛보게 된다. 개별적 풍경과 전체로서의 풍경, 닫혀있는 것과 열려있는 것, 회화적 요소와 조각적 표현을 아우르면서 그것을 장신구라는 금속공예의 기능성으로 이르게 하는 마력이 이번 전시를 통해서도 숨김없이 발현되고 있다.
금속공예가 사회 속에서 힘을 얻는 일, 공예가 실용성의 전통적 개념 속에 편협하게 갇혀 살지 않는 일, 공예가 종합적 예술로서 우리 삶 속에 호흡하게 하는 일, 공예가의 사회적 역할이 단지 작가로서 머물지 않게 하는 일... 이러한 모든 사색과 예술적 고뇌들이 김승희 정물-풍경전, 크래프트하우스 공간 속에 가득 고여있다.
장동관_인디펜던트 큐레이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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