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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신구문화연구회/김승희의 글

금속으로 그린 그림

금속으로 그린 그림

사람들은 나에게 금속으로 그림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연필이나 물감으로는 그린다는 말이 쓰이지만, 금속으로는 역시 만든다는 단어가 맞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막연한 풍경들을 시각화하기 위하여 금속이라는 재료를 쓰고 있다. 금속을 자르고, 갈고, 땜하고, 산화처리하여 착색을 하고... 땀 흘리는 노동의 시간은 시끄럽고, 지저분한 작업실에서 보내야 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만들었느냐, 이런 것을 만들려면 얼마나 큰 공장 같은 작업실이 있어야 하느냐, 힘이 들어 어떻게 하느냐 등 나의 작업과정에 대해 궁금해 한다. 그러나 금속공예의 기술적 면에서 내 작업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기법들로 만들어지며 작업실도 일반 화실정도 크기면 해결 된다.

사실 금속공예 분야는 개인적인 표현과 감성의 중요성에 앞서서 기술적 기본이 되어있어야만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특징 때문에, 대부분 기술에 의한 표현이 중심이 된다. 내 자신도 전통적인 금속공예 기법을 중심으로 작업을 해왔으나, 최근에는 좀 더 표현이 강한, 그림같이 보이는 입체조형물을 제작함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으며, 나름대로 금속이 표출할 수 있는 독특한 조형성을 추구하고 있다.



금속공예에 입문하다.

금속공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미국으로 유학가서부터다. 서울에서 대학의 응용미술학과에 다니던 시절은 모든 디자인 분야를 종합적으로 배우던 때로 별도로 개설된 금속공예 수업은 없었단 것으로 기억한다.

금속으로 무언가 만드는 왁스 주조 시간이 있었으며, 또 도면을 들고 청계천에 나가서, 철공소 아저씨들께 부탁하여 주문제작할 수 있었다. 수업시산에 아이디어를 준비해오라는 숙제를 받으면 정말 고민스러웠다. 어디가서 어떻게 아이디어를 찾아야할지 몰라 서점을 뒤지며 그림을 찾아다니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명동의 어느 헌책방에서 공예 전문 잡지[Craft Horigen]을 보게 되었는데 이 잡지에 실린 몇 장의 금속작품들을 보고 그런 작품들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게 되었다.

확실한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초조함을 무마하기 위해 유학시험이라는 목표를 만들어 매진했다. 또한 미국 공보처 도서관을 다니면서 대학시절 잡지에서 보았던 금속공예 작품 같은 것을 만들려면 어떤 학교의 어느 전공에 관계되는지를 찾아보면서 몇몇 학교에 입학원서를 보낸다.

매사가 불확실한 바로 그 시점에서 미국 미시간주 크랜브룩 미술대학원 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장학금을 준다는 증서와 함께 입학허가서가 날아왔다.

뚜렷하게 전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또한 크랜브룩 미술대학원이 어떤 대학이지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의 유학은 시작되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입학허가서와 장학금만으로 쉽게 결정하고 움직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크랜브룩 생활은 처음부터 두터운 벽에 부딪치는 것 같이 어둡고 외롭고 힘들게 시작되었다. 우선 시대적 상황 때문이겠지만, 친구들은 거의 히피족 같아서 대화도 어렵고 거리감을 좁히기 어려웠다. 또한 금속공예 수업도 내게는 너무나 벅찼다. 첫 수업부터 2kg쯤 되는 커다란 망치를 쥐고 스테인레스 봉을 뜨겁게 열처리하여 두드려야 했다. 서울의 동네대장간에서 흔히 보아왔던 일을 미국으로 유학와서 배워야 한다는 현실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출구도 없었다. 워낙 정보에 어둡고 영어 실력도 부족하여, 전공을 바꾸고 싶어도 무엇으로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게다가 장학금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인디애나 대학에서 아이커만 Alma Eikerman 교수님이 초빙교수로 크래브룩에 방문해 특강을 했다. 이아커만 교수님의 특강을 들으면 왠지 이 분을 따라가면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가 끝난 후 선생님을 찾아가 인디애나 대학으로 학적을 옮기겠다는 의사를 말씀드렸다. 아이커만 교수님은 반가와 하셨지만, 주위의 친구들은 크랜브룩이 더 유명한데 왜 인디애나 대학으로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나느 학교를 옮기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느 누구의 얘기도 들리지 않았다.

그해 여름 나는 짐을 싸들고 인디애나 대학 I.U으로 옮겼으며, 그때부터 나의미국 유학이 제대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I.U에서 나는 전형적인 미국의 대학 생활을 맛보았고, 배움의 줄거움도 느낄 수 있었으며 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아이커만 교수님은 금속공예 기법을 기초부터 상세히 가르쳐주셨으며, 미술이론이 겸비된 세미나식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작품을 평가해주셨다. 외로운 타향에서 선생님께 의지하며, 선생님의 예술관과 철학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의교육에 대한 열정과 자상함 덕분이다.

아이커만 선생님은 화가나 조각가의 예술관 작품을 분석하여 자신의 금속공예 작업에 응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독특한 수업방식을 갖고 계셨다. 또 수업에 철저하고 엄격하셨다. 숙제가 너무 많고 반드시 해야 할 의무사항과 지켜야 할 규율이 많아서 매일 불평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대학원 재학생 15명 중 열 두세명이 현재 대학 교수로 열심히 금속공예 작업을 하고 있으니 아이커만 교수님의 정열을 제자들이 모두 이어받은 것은 아닐까.


한국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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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나의가장 큰 관심은 우리나라 전통 금속공예 연구였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국 금속공예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서 여러번 망신을 당했기에 한국 금속공예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1974년 여름 나는, 미국으로 떠날 때와는 달리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의 모습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여 기거하게 된 곳이 큰 형님 댁이었는데, 마침, 마음씨 넉넉한 큰 동서께서 딸 진아를 돌보아준 덕분에, 미국에서 제작해온 작품을 모아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미도파백화점(현, 롯데백화점 본점 영플라자) 4층에 위치한 화랑에서 연 나의 첫 전시는 기대 이상으로 커다란 반응을 받았다.

1975년만 해도 화랑이 몇 개밖에 없었으며, 전시회도 많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금속공예는 새로운 전시였기에 미술계 인사를 비롯한 많은 이가 찾아와 신가한 듯 내 작품을 열심히 살펴봐주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지만, 첫 전시회는 내게 가장 힘들었고 또한 많은 의미를 남겨준 뜻 깊은 전시였다.



전통 금속공예를 발견하다

한국에 돌아온 나의 큰 관심은 한국 금속공예의 역사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 금속공예를 공부하는 동안 가끔 친구들이 한국 금속공예에 대하여 질문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제대로 답변도 못하고 엉뚱한 대답만 해서 곧잘 웃음바다가 되곤 했다.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전통기능 보유자를 찾아다니면서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얻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은수저를 두드려서(단조기법) 만드는 장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서 우리나라에는 200~300명의 은수저 기술자들이 아직도 수공으로 은수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크랜브룩에서 공부할 때 내가 수저를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던가... 비싼 유학의 수업 중에 수저 만드는 기법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미국같이 산업이 대형화해버린 산업사회에서는 일반인들이 집에서 손으로 만든 은 식기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수저 만드는 기술자의 정확한 손놀림, 분명한 재료를 다루는 방법들을 보면서 나는 그의 숙련된 작업실에서 아무런 자부심없이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 역사의 중요한 맥을 찾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진국에서는 이어져오지 못한 수공기술이 한국에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금속공예를 전공한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실제로 지금까지 내가 해온 금속공예 작업의 대부분이 우리 전통 기법, 재료 또는 조형성에서 내용을 얻은 것들이기 때문에 전통 금속공예에 대한 나의 신뢰와 기대는 더욱 각별하다.



한식 상차림 전시회를 통한 한국미의 체험

1988년 한 유명호텔 안에 있는 보석상에서 우리나라 전통식기를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특별한 전시회를 의뢰받았는데 내게는 우리 전통의 미를 체득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 전시회에서 나는 반상기, 구절판, 찜기, 촛대, 은수저 등을 제작하여 한식 상차림을 준비하였는데, 주최한 보석상 고객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고 많은 주문을 받게 되어, 본격적인 은기 공방을 운영해애 할 처지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은기제작 기법은 크랜브룩 시절에 터득한 것으로써 그곳에 있을 때는 고된 작업이라고 생각했던 기법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이런 공방을 운영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은기를 만들고 판매하면서 그것이 공방을 운영할 자금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내가 이렇게 실용적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기를 제작할 때 기술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형태의 볼륨감, 비례감, 재질감 등에서 모든 감성이 통합되어 완성된 그릇이 나오기까지 조형적인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은기 나름대로 도정해야 할 조형적 문제들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또는 편안하게 쓰여야 한다는 커다란 과제 때문에 작가는 표현을 절제해야 했다.



풍경을 주제로 오브제를 만들다.

공방에서 은기를 제작해서 운영에 도움이 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표현이 강한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생각나는 대로 스케치하고 옮겨 놓은 것도 중요했지만, 그림에서나 다름 어떤 매체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나만의 무엇을 만들고 싶었다.

금속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색감과 질감, 금속이기 때문에 가능한 형태, 내가 할 수 있는 용이한 기법으로, 나만의 세계,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르면서도 만드는 일에 몰두하면서 지냈다. 이 시기에 나는 자주 동네 뒷산에 오르면서 스케치를 하면서, 그려진 풍경화를 어떻게 금속이라는 새로운 재료로 옮길 것인가 여러 가지로 모색하고 있었다. <산에 오르면서...>라는 연작을 시초로 풍경을 주제로 한 오브제들을 금속으로 만들어갔다.

1987년 풍경을 주제로 한 오브제들을 모아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까지 생활용품, 실내용품, 장신구, 은기 등을 제작해 온 공예가로서 새로운 제시,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관람할 것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뭇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전시회를 개관했는데... 그런데 개관 어느 날, 1987년 11월 28일 신문과 TV매체 등 모든 언론 매체 등 모든 매체를 경악케 하는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KAL기 폭파기도범 김현희가 체포된 것이었다. 그날 따라 갑자기 더 추워진 날씨 탓인지 화랑 앞 거리는 사람 그림자가 자취를 감춘 삭막함뿐이었다.

전시장은 썰렁하기만 하고 오랫동안의 작업과 전시준비의 간장 탓으로 지쳐있던 내 자신도 땅 밑으로 꺼져 내려가는 기분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시회가 끝난 다음 주변 미술인들이나 평론을 통하여 내 작품들이 공예가의 영역을 뛰어넘은 시도라는 평을 듣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조각이나 공예의 영역은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활 속에서 쓸 수 있는 용기들을 만들던 공예가가 자신의 감성을 표현한 작품을 했다고 갑자기 조각가가 되는 것도 아니라 내가 누구이고 어떤 배경을 갖고 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냥 내가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보다는 소중하다.



민화의 자유를 배우다.

1987년 풍경을 주제로 한 금속 오브제 작품들을 발표한 후, 조선조 민화, 특히 실내풍경을 그린 문방구화를 보게 되어, 이 그림들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면서 내 작품들은 좀 더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들어가는 민화적인 요소를 띄게 된다. 민화의 솔직 담백함, 그 자유스러운 표현, 밝고 따뜻한 생활의 모습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웠다.

앞뒤로 놓여진 물체들도 평면으로 나란히 배열하거나, 크고 작고의 차이도 그리는 사람 뜻대로 자유롭게 구성하면서도 생활에 대한 긍정적인 밝은 모습이 따뜻한 애정으로 전체 그림을 감싸고 있는 듯하였다. 민화의 문방그림에 영향을 받아 <그릇이 있는 실내 풍경>이라는 시리즈를 1991~1992년 한국 미술관과 동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그릇, 화병 같은 생활 용품들이 자연물인 나무, 잎사귀, 혹은 지평선들과 구성되는 입체물들이다. 민화의 장식 요소들을 삭제하고 단순화된 입체로 재현하면서 <투명한 공간>이라는 특정 공간을 연출해보려 했다. 내가 명명한 ‘투명한 공간’에서 나는 내 추억 속의 풍경과 오늘의 예술성을 복합해보고 싶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공간, 앞뒤의 공간적 배열이 자유롭고 고정관념을 탈피할 수 있어 많은 것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결국 내가 금속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실제로 그리는 것보다는 만드는 것이지만 나의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의 표출, 꿈꾸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싶다.

1987년 금속조형물을 주제로 한 작품 발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90년대 중반까지 나의 작업은 가로크기 1~2cm정도 걸 수 있는 작품이거나 어딘가에 놓일 수 있는 오브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금속공예에는 나름대로 독특한 영역이 있으며 그것은 생활 속에서 명백한 기능을 갖고 있는 장신구, 식탁용구, 실내용품 등으로 결과물이 나온다. 그런데 순수한 나의 감성적 표현을 중심으로 한 이 조형물들이 발표되면서 미술계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고 또한 국립현대미술, 호암미술관 같이 중요한 미술관에서 내 작품들을 수집해주었기에 나로서도 새로운 영역이라는 자부심으로 뿌듯했다.



공예화랑 크래프트하우스 개관

그러나 공예는 회화, 조각과는 분명 구별되는 전문성을 갖고 있었기에 전문 화랑이 절실히 필요한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내가 전시회를 한다고 해도 대부분 회화나 조각을 주로 전시하던 화랑에서 해야 되는데 이런 화랑에서는 공예 작품을 취급할 수 있는 전문성이 없어 전시회가 끝난 후 작품 관리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부분 내 작품을 구입하거 싶거나 관람하고 싶은 일반 고객들은 나의 작업실을 찾아오게 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또한 작업을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작업 중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반갑기만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공예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전문 화랑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집 근처 작은 공간으로 소규모로 시작을 하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예화랑을 구상하게 되었다.

1994년 봄, 나를 포함한 4명의 금속공예작가들이 힘을 합쳐 크래프트하우스-공예 전문화랑 개관전을 열었다. 공예화랑을 열고나서 일반 대중들이 공예에 대한 욕구가 상당하는 것을 다시 한번 체험하는 소중한 경험을 얻게 되어, 대학에서 공예를 가르치는 내 입장으로는 특별한 수업을 받은 것과 같았다. 화랑에서 일반인들과 접하면서 그들의 공예에 대한 기대와 욕구를 들어보여 새로운 가능성을 배워나가는 실질적인 경험을 축적해 갈 수 있었다.

1995년 후반에는 인사동, 압구정동, 동숭동, 등에서 5~6개의 전문 공예화랑이 개관하여, 공예계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 있어서, 공예가로서 용기를 얻고 있다. 금속으로 생활용품을 만들던 공예가로서, 금속으로 생활용품을 만들건 공예가로서, 금속으로 순수감성의 표현을 위주로 한 오브제도 만들어 “금속으로 그린다”라는 말을 들으며 다양하게 변신하여 왔던,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것저것 일을 많이 벌이고 늘어놓고 하는 것 같지만 나의 궁극적인 관심은 나의 생각, 꿈, 희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것이 생활용품이던지 혹은, 순수조형물이던지, 혹은 순수조형물이던지, 더 나아가서 공예화랑이 될 수 있지만 내가 갖고 있는 이상과 아이디어를 현실화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주고 더욱 행복해지기 바라기 때문에 내가 하는 작업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