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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신구문화연구회/김승희의 글

[김승희의 장신구 이야기] 가락지가 의미하는 것

 

 

 

김승희의 장신구 이야기

 

 

가락지

 

 

 사단법인) 우리장신구디자인연구회 대표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명예교수

김 승 희

 

 

백과사전에 “손가락에 끼우는 둥근 두 개의 고리”로 설명되는 가락지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장신구 이다. 흔히들, 가락지는 중국의 디자인을 영향 받은 것으로 알고 있고 필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똑같은 두 개의 반지를 쌍으로 같이 끼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여성들에게 금속을 몸에 지니는 것이 금지된 관행에 따라 가락지와 같은 장신구들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가락지는 똑같은 디자인의 두 개의 반지가 쌍으로 끼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와 같이 쌍으로 끼는 반지는 서양 장신구의 역사에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가락지는 우리고유의 정서와 역사성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상징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락지에 대하여 기록된 문서나 어떤 시대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하는 자료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야 할 대상이다.

필자는 가락지에대한 뿌리를 찾고자하는 호기심과 관심으로 지난 10년간 많은 자료들을 수집해 보았고 또한 가락지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발표하여왔다.

 

 

가락지가 의미하는 것

 

가락지라는 단어가 어떤 뿌리를 갖고 시작되었는지 확실한 자료는 없지만 사전 단어검색을 해보면 가락은

⦁가늘고 긴 것을 나타내는 형태

⦁손가락 발가락의 옛말

⦁둥글다는 어원 등으로 정리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인지부터는 모르지만 가락지가 신분의 관계없이 일반화되어 착용된 것으로 보인다. 가락지 재료가 금, 비취, 호박 등 고가인 경우에 궁중 안에 왕가나 양반계급에서, 은, 칠보 등은 중산층에서, 구리, 철 등은 서민층에서 착용되었다.

 

가락지에 나타나는 문양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억압된 여인들의 염원과 희망을 표현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주었다. 가락지 위에 표현되는 문양들의 의미는 가족의 건강, 가정의 화목, 다산, 영복 등을 기리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주로 등장하는 문양은 박쥐문이 가장 많이 쓰였고, 목단문, 국화문, 매화문, 연화문, 당초문, 복숭아문, 난초꽃문, 네잎꽃문, 나비문, 백일홍문 등이 사용되었다.

가락지의 특징은 똑같은 문양의 외지가 쌍을 이루어 두 개를 같이 낀다는 것이다. 똑같은 문양 두 개 낀다는 것은 특별한 뜻이 있는듯하다. 전쟁이 많았던 우리나라의 역사과정에서 가족이 헤어지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수년 또는 수년 후 재회할때 가락지로 짝을 맞추어 가족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 복식 문화사전에서는 ⌜가락지는 원래 장식물이기보다는 신분확인을 위한 신표인 신물(信物)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남녀의 애정에 대한 믿음과 절개의 징표로 쓰였다⌟고 정리되어있다.

 

가락지는 단순한 장신구의 의미를 넘어서 대를 물려줄 수 있는 그 집안의 전통과 가풍의 상징으로 대변된다고 본다.

상징적인 의미와 가치 때문인지 가락지는 착용성 보다는 비교적 크고 두툼하게 제작되어 오랫동안 간직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 친정어머니로부터 딸에게 가락지는 가문의 가보로 전해졌고 전통을 이어주는 폐물로 인정되었다.

 

한국에서의 가락지에는 가문의 영광과 후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염원과 남,녀 또는 음,양의 화합의 뜻이 들어있는 상징적 장신구이다.

고려 말 원의 지배를 받았을 때 처녀들을 공녀로 바쳐야했다. 이때 가족간의 재회를 약속하기 위하여 가락지를 나누어 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때의 가락지는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만남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가락지하면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기생 논개의 가락지이다. 논개는 열 손가락에 굵은 가락지를 끼어 양쪽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여 왜장 계야무라 로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자진하였다.

이때의 가락지에는 나라를 지키고자하는 가냘픈 여성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궁중이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계절에 따라 다른 가락지를 끼었는데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金氏)의 <사절복색자장요람>을 보면 “가락지는 10월부터 정월까지 금지환을 끼고, 2월과 4월은 은칠보 지환을 끼고 나서 5월 단오 견사당의(絹紗唐衣)를 입을 때에는 옥지환이나 마노지환을 끼고, 8월 염간(炎間)에는 광사당의(光紗唐衣)를 입을 때 칠보지환을 끼어 9월 공단당의(貢緞唐衣)를 입을 때까지 계속한다. 규칙이 이러하니 여름에는 금을 못 끼고, 겨울에는 옥을 못 끼나 춘추에는 옷에 따라 마음대로 낀다.” 라고 하였다.

 

 

   영친왕비 비취 가락지, 호박 가락지

   유물번호; 장신구-137,139

   크기;(cm)지름3.5,두께1.4/ 지름3,두께0.9 재질; 호박(금패), 옥(경옥)

 

 

경빈김씨가 당시에 궁중의 패션과 장신구에 대한 관심을 이 글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고 당시 여성들이 가락지를 통하여 멋을 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가락지의 현대적 디자인 시도

똑같은 문양의 가락지를 쌍으로 끼는 것 보다는 색채의 대비를 지닌 가락지를 낀다거나, 의미가 있는 문양으로 두 개의 반지를 엮음으로써 새로운 현대적 디자인을 시도하였다.

가락지를 묶어 윗면에 꽃봉오리를 섬세하게 표현한다거나 나비문양, 용의 얼굴 등 여러 가지 문양을 시도하였다.

 

 

 

 

           

                            꽃봉 은흑비취 가락지                                          용 은 가락지

 <디자인 : 김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