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제작적인 정물화> 유준상 _ 미술평론가,1991
물제작적인 정물화
김승희의 작품을 대하면 인간의 손과 마음이 서로 교류하면서 공간을 틀잡아나갔던 통사通史적인 경과에 관한 새삼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단층斷層으로서의 형식과 물제작적物制作的인 실체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공간을 위상하고 있는 것이 특성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의 위상을 망치나 연필로 그릇을 만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손은 마음의 지시에 따라 기하학적인 토폴로지를 위상한다는 것이며, 마음은 손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게슈탈트의 지각형태知覺形態를 인지한다는 것인가.
공예에 관한 통념은 여러 가지 소재를 사용해서 생활용구를 만드는 정도다. 그러나 동양에 전래하는 [고공기雇工記]에 따르면 천지재공天地才功이 합체할 때에야 좋은 물건으로서의 공예품工藝品이 나온다. 하늘[天]에는 춥고 따뜻함의 시간이 있으며 땅[地]에는 기氣인 강하고 부드러움의 공간이 있는데, 이러한 공간 속에서 자라나는 자연의 소재들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공예가의 기술 가운데는 공功이라는 인간적인 지혜와 기교가 있어서 이것이 전기한 조새와 하나로 어우러질 때 슬기로운 공예품이 창조된다는 것이었다.
예술의 가원은 이처럼 인간의 숨결이 그 시간의 지속을 통해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한 역사를 가리킨다고 하겠으며, 고려 청자의 청아함이라든가 조선조 백자의 순박함 등은 그들이 점유하는 공간의 형식을 통한 시간의 보편형식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프랑카스텔Pierre Fran castel은 모든 조형예술은 필연적으로 공간예술이라고 했으며, 예술가의 상상적인 숨결의 짜임새가 시간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조형의 형태form라고 한다. 예술은 인간의 여러 가지 활동 가운데서도 ‘매우 견실한 작업’을 가리킨다는 프랑스 미학자 유이망Denis Huiman의 정의는 이러한 시적詩的인 노동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김승희는 ‘기술로부터의 자유’라는 표현을 쓴다. 또는 ‘도구의 소재화’라는 비유를 들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김승희의 예술에 관한 가치관을 반영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며, 수리오Etienne Souriau가 [미학의 장래]에서 말했던 ‘예술’과 ‘공예’의 유사성을 상기시킨다. 즉 공예가 단순한 조작적 직업으로서 결과에 대한 평가나 취향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만들어내는 것으로 통념되는데 대한 경고인 것이었다. 예술은 공예의 정스, 즉 그 에센스를 섭취한 최상의 공예일 때 좋은 예술이라는 뜻이다.
김승희의 공간은 뜻밖으로 산업화된 도시동간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한다. [고공기]에서 말하는 천지가 그의 공간인 셈이다. 그는 시간에 따르는 여러 생물생태生物生態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한다고 하묘, 여기서 섭취되고 잠재된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공예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자연 감상은 늘 피동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며, 자연인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그의 의식에 잠재된 지속持續을 공예로써 표현한다. 그의 물제작物制作은 실용성이 배제된 단층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정물靜物의 무상감을 새삼 일깨워 준다. 비유를 달자면 정물의 회화성繪畫性을 물화物化로서 표현한 세계다.
이것은 김승희 의식의 단층이라고 해야겠다. 예술을 의식한다는 것은 예술의 흐름 위를 부유하는 경험을 뜻할 수도 있겠으나, 그 흐름 위를 부유하는 경험을 뜻할 수도 있겠으나, 그 흐름을 일도양단으로 잘라내어 그 단층으로도 파악된다는 것이 인간의 의식구조이기도 하다. 회화의 이차원二次元은 이러한 단층의 형식을 가리키며, 김승희는 예술과 공예를 하나의 현상을 두 가지 측면으로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인간 의식이 단층으로 분화되었던 신통기의 ‘기억을 만들어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준상-미술평론가,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