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 보도자료

시사 PEOPLE TODAY. 새로운 도약을 위해 날갯짓하다.

갤러리소연 2012. 8. 3. 09:27

금속공예가, 김승희교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날갯짓하다

- 정년을 앞둔 김승희국민대교수 제 2의 도약을 위한 창조프로젝트-

 

“우리나라는 ‘금속공예’의 나라입니다!” 작은 자연이라는 뜻을 가진 다목적 공간 안에 있는 김승희 국민대교수의 개인 작업실인 ‘소연小然’에서는 특별한 강의가 한창이었다. 중국이 도자기로 수저를 만들고 일본이 나무젓가락을 만들 때 우리는 금속으로 만든 수저젓가락을 사용했던 거예요.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금속공예의 발달요!” “그래요. 우린 명실상부한 금속공예의 나라였습니다.” 김승희 교수가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강의를 이어나가는 모습은 죽이 척척 맞는 놀이마당 같은 분위기였다. 전문인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이런 ‘금속공예’ 강의에 40~50대 여성들이 모여와 귀를 쫑긋 열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경쾌하고도 세련된 금속성 합창이 팍팍 튀는 것 같은 분위기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자니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들었던 고구려사 강의다. 세계. 1.2차 대전 이전에는 그 어떤 전쟁도 고수高隋전쟁처럼 한꺼번에 100만 대군이라는 거대한 군인들이 동원된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맨손으로 싸웠을까? 아니다.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울 순 없다. 날카롭고 성능 좋은 강철 검 하나쯤은 손에 쥐고 싸웠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나와 있다. 우리나라는 쇠가 많이 산출되고, 질이 우수해서 외국으로 수출까지 한 나라라고. 쇠는 중요한 교역수단이며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쇠’돈이 보편화 될 만큼 금속제조와 철기문화가 생활화 되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금관 출토와 수많은 금.은.동의 불교유물과 금속활자 발명 그리고 조선시대의 문방사우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속공예품을 접할 수 있었다. 비근한 예로는 동과 아연과 주석을 합금하여 방짜기법으로 만든 유기그릇을 일반가정에서도 흔하게 생활용구로 만들어 썼지 않은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민족에게는 금속을 다루는 탁월한 DNA가 있었나 보다. 그것은 풍부하고도 질 좋은 금속자원이 있기에 가능했고 금속을 활용하여 갈고 닦을 수 있는 실력과 솜씨가 뒷받침 된 결과다. 그렇다. 우리는 금속공예의 나라였다. 이제는 우리 ‘금속공예’에 대해 바로 알고 잘 발전시켜야 한다. 한류 붐을 타고서 한국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우리가 만든 공예품 하나쯤은 사들고 갈 수 있도록 공예 명품들을 선보여야겠다. 김교수가 한국이 금속공예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막연한 애국심에서가 아니다. 36년 6개월의 교수생활을 통해서 금속과 부딪치며 천착해온 결과다.

 

 

김승희의 학업과 사랑

 

김승희는 숙명여중고를 거쳐 서울대 미술대를 졸업했다. 이 시절 디자인에 대해 통사적으로 배우기는 했다. 하지만 금속공예를 제대로 접할 수 있는 별도의 수업은 개설돼 있지 않았다. 한국의 미술계는 평면작업에만 매몰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명동거리를 거닐다가 헌 책방에 들르게 되었다, 여기서 ‘공예전문지(Craft Horizen)’ 하나를 발견하고 금속으로 만든 작품 사진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이를 본 김승희는 자신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 열망을 품게 된다. 유학을 목표로 매진해나갔다. 그 결과 크랜브룩 미술대학원(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장학증서와 입학허가서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김승희의 유학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짧은 영어실력과 부족한 전공지식에서 오는 자신감 결여까지 겹쳐 모든 게 낯설고 힘든 것투성이였다. 그러던 중 크랜브룩에 초빙교수로 와 있는 아이커만 교수의 특강을 들으면서 김승희는 그제야 전공분야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활로를 찾아 I.U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다. 이때부터 김승희는 전형적인 미국의 대학생활을 제대로 만끽하면서 금속공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게 된 것도 이곳이었다. 당시 아이커만 교수에게 배운 대학원생 15명 중 열 두세 명이나 대학교수가 됐을 정도로 I.U 대학원시절은 김승희에게 실력과 자신감을 갖추게 해준 소중한 기간이었다.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과 교수생활

 

4년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첫 관심사는 우리나라의 전통 금속공예 연구였다. 미국에서 “한국의 금속공예는 어때?”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제대로 된 답변 하나 못하고 얼굴만 붉혔던 뼈아픈 기억은 김교수로 하여금 한국 금속공예의 역사적 배경과 특징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했다. 국립중앙박문관이나 전통기능 보유자를 찾는 과정에서 200~300명의 기술자들이 수공으로 은수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 정확한 손놀림과 재료를 마침맞게 다루는 솜씨를 눈여겨보았다. 그 후 김승희의 금속작업은 우리 전통기법과 재료와 조형성에 바탕을 두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것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화된 선물이었다.

 

한편 미국에서 돌아온 이듬해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현 롯데백화점 본점(구 미도파백화점)에서다. 김승희의 첫 개인전은 김승희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다음은 올림픽을 앞둔 80년대 후반기 이야기다. 반상기, 구절판, 은수저, 촛대 등 우리나라 전통 식기를 디자인하고 출품하여 호평을 얻고, 작품 주문이 쏟아지는 바람에 따로 공방을 운영하는 데까지 사업이 발전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산학연대인 셈이다.

 

그럼 교수로서의 첫발은 어땠을까. 유학 시절 미국 교수들은 각자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하도록 졸업반 학생들을 독려했다. 한국에 온 김승희도 미국에서 보고 들은 대로 포토폴리오를 만들어서 여러 대학에 보내게 된다. ‘나를 채용해 달라.’고 손수 문을 두드리는 이런 시도는 당시에만 해도 학계에 큰 화재가 됐다. 그러던 중에 김승희를 교수로 초빙해준 곳이 국민대였다. 김승희는 지금껏 국민대에서 36년 6개월째 재직하고 있다.

 

김교수가 국민대에서 한일은 많다. ‘금속공예과’를 개설했고, 테크노디자인대학원과 이밖에도 쥬얼리디자인센터(J.D.C)를 열어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미술계에서는 ‘금속공예과’에 관한한 국민대 금속공예과가 우수하다는 평을 하곤 한다. 그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학생들이 다 자식 같았다며 밝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인즉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 먹고 살길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 아니냐? 누구보다도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필요로로 하는 사람들이다. 괴테는 일찍이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했다. 김교수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그런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실한 열매를 맺게 했나 보다.

 

모르는 사람은 금속공예(?) 하면 쇳소리가 요란한 거창한 장면을 떠올린다. 얼마 전에도 대형병원의 벽면 장식용 작품을 제작했는데 10m 짜리 대형작품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작품을 하는 데는 엄청나게 큰 작업실일 거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일반 화실만한 공간이면 충분하다. 대형작품이라 할지라도 부분별로 제작하여 마무리할 뿐이라 했다. 직접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니까 금속공예는 거창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다고 한다.

 

 

8월이면 맞게 되는 정년, 그리고 새로운 도약

 

요즘 일부 대학교에서는 科를 폐지하거나 통폐합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경제논리에서다. 금속공예과의 예를 보자. 인사동에 쌈지길이라는 건물이 처음 생겼을 때 국민대, 서울대, 이대, 배제대 등 6개 대학의 공예 관련학과가 입점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대의 ‘소연’ 배놓고는 다 철수한 상태다.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한국의 명품공예품을 찾는 필수코스로 육성한다는 개장한 ‘쌈지길’이었다. 그러나 매출로 연결되지 않는 통에 소연도 양자택일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때마침 방학을 맞은 김승희교수는 ‘소연’을 지키고 앉아 오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각 달마다 탄생화를 선택하여 10만원 안팎의 탄생화 장신구를 만들기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0만원 안팎의 탄생화 장신구는 남자친구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주는 인기있는 선물리스트에 올랐다. ‘한글커플링’도 인기품목 중의 하나다. 공예품이란 누군가 애용해주지 않으면 존재가치를 잃는 분야이다. 앞서도 김교수는, 80년대 후반에 은그릇 세트를 출품하여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해 별도의 공방체재를 갖춰야 했을 정도였다. 공예가들은 자신이 만든 명품을 누군가 소장해주기를 바란다. 공예가의 성공은 작품을 구매해주는 고객이 있을 때 존재가 빛나는 것이니까.

 

이런 그녀가 또 다른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크게 배움과 진로 탐색기를 거쳐 전공분야를 확정하고 학업의 발전을 위해 유학시절을 보낸 기간과, 귀국하여 교수로 금속공예가로서 지내면서 한국의 금속공예발전에 힘 쓴 시절 그리고 이후 김교수 개인의 역량을 집약하여 사회교육원과 갤러리를 운영하는 새로운 대중을 위한 금속공예과정인 창조프로젝트의 가동이다.

 

끝으로 취미가 뭐냐, 금속공예가로 교수로, 아내로 엄마로 지내오는데 힘든 점은 무엇이었느냐. 물었다. “제일 힘든 것은 인간관계였어요. ㅎㅎ”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냐 물으니 첫째도 둘째도 작업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작업을 하기위해서는 남편은 물론 아이들과도 부딪치지 않도록 늘 참고 감싸 안았다고 한다. 작업 외에 가장 좋아하는 일을 굳이 하나 말해달라니까 가까운 사람들과 막춤을 추며 노는 일이라고 했다. 김승희 교수 참 멋지다. 순수하다. 그리고 솔직하다. 이런 마음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는 다 있지만 솔직히 표현하기가 힘든 거다. 그런데 당당히 표현해주니 말이다.

 

김승희 교수는 8월이면 36년 6개월의 교수생활을 마무리한다.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해 힘찬 날갯짓을 또 한 번 할 차례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개설한 ‘금속공예’ 강좌가 9월이면 열린다. 또 다른 모험이고 새로운 시도이다. 이때부터는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는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될 것이다.

아이들의 입시와 가사 일에서 조금은 놓여난 4~50대 주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약간의 솜씨와 근성과 센스만 있으면 된다. 그들과 함께 목걸이 귀고리 반지 브로치를 만들 거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차고 나오는 것처럼 멋진 쥬얼리를 만들어 걸고, 달고, 차고, 품평할 거다. 런어웨이를 걷는 모델들처럼 당당한 그녀들의 교실이 될 것이다. 창조의 기쁨을 만끽하는 이 같은 일 즐겁지 아니한가. 신나지 아니한가. 이제 좀 더 여유롭고 싶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인처럼’ 한껏 성숙하고 멋진 금속공예가로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도약하고 싶다.

 

당신들에게 선물한다. 김승희와 함께 하는 환상적인 장신구 만들기 프로젝트를! 돈 몇 푼 안 들이고 저렴하게 손에 쥘 수 있는 길을. 김교수는 또 종로에 군집해 있는 귀금속단지와 연계해 쥬얼리산업의 발전에도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밑거름이 되겠다는 단단한 포부를 밝혔다. 이타적인 결심이 아닐 수 없다.

김교수를 볼 때 경력단절 없는 영원한 현역의 모습을 본다. 기술은 참 좋다. 예술은 아름답다. 여기 새로운 도약을 위해 날갯짓 하는 사람 그가 바로 김승희교수다.

 

시사 PEOPLE TODAY.

박정례기자

2012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