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 보도자료

낯선 경계로 접어들 때마다 빛나는 것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7. 21. 15:01

낯선 경계로 접어들 때 마다 빛나는 것

금속조형작가 ‘김승희’에 대한 기억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 미술계가 이념 갈등에 휩싸여 있을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하나의 소리 없는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랜 역사를 통해 고착된 차별적 구조들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혁파하는 소용돌이였다. 주지하듯 그 중심적인 화두는 페미니즘, 탈중심, 장르 분리 관행에 대한 회의 등이었다. 이 명제들이 아직도 진행 중인 가운데 공예를 재조명하고, 아울러 공예 또한 내부에서 보편적 심미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종의 움직임들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바로 그 흐름 속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들이 적지 않은데, 그 중 김승희의 활약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30년 넘는 창작의 대장정을 돌이켜보면, 작가가 추구하는 미의 이상은 하나지만 그 방법과 매체는 언제든 유연하고 자유롭고 선택하는 특징을 보여왔다. 정말이지 오랫동안 자연 대상을 노래하는 주제로 일관해오면서도 작가는 방법에서 만큼은 경직되거나 갇혀있지 않았다. 또한 어떤 낯선 경계에 서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회화든, 조각이든 혹은 디자인이든 그 경계를 넘기 위한 비자란 원래가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만큼이나 그가 낯선 경계를 넘을 때마다 의미 있는 성취들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작가의 작업은 금속공예계의 새 바람을 몰로 온 기폭제였다. 자유롭고 역동적인 입체 구성들과, 아우라aura혹은 시적 서정이 짙게 밴 감각적 평면구성들이 어우러진 작품들은 분명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특히 1987년 개인전(그로리치화랑 초대전)은 기능만을 고집하거나 혹은 극한적 가공만을 능사로 여기던 당시의 작가의 작품들은 기능적인 형태들을 재구성하거나 표현적으로 해석하는 데서도 성취를 보였지만, 제한적인 금속재료들과 전통적인 가공기법을 통해서도 표현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실증해 주었다. 합금에 따라 다양한 재질을 보이는 동이나 은을 총해 여러 가지 조합을 이루고, 각종 재질의 조합과 구성 및 연출 등을 통해 뉘앙스가 풍부한 조형언어소素와 문맥, 플롯을 이루어내는 점들이 조각가들에게도 영향을 준 바 있다.

그는 공예의 위축된 위상을 탓하기보다는 공예의 장점들을 살려 개성적인 조형의 창출을 일구어내는 재능을 갖추고 있는 작가다. 작가의 조형적 성취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결코 공예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제스처가 아니라, 공예를 가장 적극적이고도 전형적으로 실행하면서 개선해가는 것이 비결이다. 결국 공예와 순수예술은 상극이 아니고 서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며 상호의존적 관계이어야 한다는 미학적 신념이 가장 공예적이면서도 가장 참신한 조형성을 가능케 했다 할 것이다. 몇 개의 조형 단위들 표면에 나타난 회화적 효과들, 그 효과들을 포함한 유닛Unit들의 재구성도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이렇듯 대상과 공간을 자유롭게 해석하고 연출함으로써 작가의 조형은 동시대 미의식과 조형적 패러다임에 적극적으로 부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작가의 시선은 부분적 완성도를 중시하면서도, 전체와 구조와의 유기적 상호 관계를 엄격하게 지키고자 했음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금속 단위체들의 표면에 가해지는 구성 혹은 회화적 효과들은 전체의 짜임새나 균형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고자 하는 절제와 비례의 탐색 노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재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성物性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관조적 여유와 미의식이 작품의 격을 온전히 유지시켜줌을 알 수 있다. 장인적 몰입이라는 것이 작업하는 작가에게 행복감과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 혹은 더 넓은 지평과 시야를 유지하면서 부분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공예이면서도 그 어떤 조형과도 견주어 손색이 없었던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공예 고유의 방법과 기법들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을 협소한 범주에 가두어두지 않았던 데에서도 기인한다. 기법이라는 것은 조형에 필요조건이지만, 그것이 또한 가장 심각한 함정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우리 조상들이 가장 격조 높은 미의 원리로 간직해온 ‘무기교의 기교’라는 명제는 우리 동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기법에 과도하게 에너지를 쏟아 온 장르의 경우는 더욱 조심스런 문제다. 작가의 조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테크닉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테크닉이 필요이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또한 그 기법들의 과정마다 자발적인 유희의 충동들이 개재介在하면서 그것은 더 높은 가치의 가능성을 열어보이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점이 가장 공예적이면서도 공예의 상궤常軌를 벗어난 새로운 지평으로 확산을 가능케 한 요인일 것이다.

이렇듯 재료와 기법에 대한 경지와 자연스럽게 무르익은 유희적 동기들은 향후 작가의 조형이 내용 면에서 더욱 풍부할 수 있도록 한 주요 요인인 것은 분명하다. 작가는 1990년 이후부터 철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들을 과감하게 자신의 작업에 도입하게 된다. 특히 철의 도입은 경험적으로 더욱 심오한 반응과 반향으로 연결되었다. 공예의 지평이 더욱 확장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전의 동이나 은을 통한 작업은 아무래도 아지자기하고 섬세한 조형 언어가 주조를 이루지만, 장식적 범주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유현幽玄한 철의 재질이 작품의 구조에 삽입됨으로써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작품이 강렬해지고 심오, 중후해졌으며, 작품의 크기가 거대해지고, 입체와 반입체 등의 다양한 구조를 띠게 되었다.

작가는 소위 쓰임새를 초월한 순수 표현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장신구와 같은 기능적인 작업에도 적극적이다. 전자가 회화나 조각에 대한 관계의 것이라면 후자는 디자인에 대한 관계의 것이다. 작가의 작품들은 항상 경계에 놓고 볼 때, 더 빛을 발한다. 접경의 영역들이 절충되고 결합하여 일으키는 시너지가 크기 때문이다. 요컨대 양자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종합적이고도 개방적인 미의식은 하나의 브로치에 거대한 기념비와 같은 울림을 담으며, 또한 거대한 대작도 아기자기한 짜임새를 통해 감성적 만족을 배가시킨다.

최근 들어 작가의 창작 대장정은 새로운 영역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종래의 벽을 장식하던 반입체 작품은 이제 벽 그 자체를 만드는 차원으로 전환하고 있는 듯하다. 작업의 지평을 환경의 차원으로까지 넓히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구체적인 언급은 아직 없지만 해체적이고 파격적인 단계로 접어든 느낌이다. 지난 봄 북한산 근처에 임시로 쓰고 있는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거대한 대형 부조 연작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 동안 보아온 작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변신 자체가 놀라웠다. 크고 작은 판재 위에 연극 무대와도 같은 회화를 먼저 완성한다. 단순히 밑칠이라 하기에는 그 회화적 배경의 비중이 너무 크다. 회화적 구성과 마티에르 자체로 작품은 거의 완성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화룡점정을 하듯 그 위에 별도로 가공된 금속의 이미지들이 자리를 찾아 고정된다. 그리하여 종래 보지 못했던 색다른 풍경을 그리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며 또한 연출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화 효과를 실현하는 데 안료가 혼합된 폴리코트polycoat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조각의 원형에 이용되는 경우가 보통인 이 재료를 회화적으로 활용한 예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듯 다시 한번 경계에 서서 이질적인 낯선 재료를 과감히 작품 공간 안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마저도 마티에르가 풍부하게 살아있다. 혹시 동시대에 의한 벽 자체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을까? 과거 철재를 도입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다. 이질적이기는 해도 금속이라는 동질적 재료들의 조함은 그 나름대로 통일성이 주어진다. 그런데 최근 평면 혹은 반입체 작품들은 회화는 회화대로의 자율성이 추구되고, 다시 부가되는 금속의 단편들 역시 자율성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복합적 조형 조건들을 창조적으로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조금은 낯선 풍경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줄기찬 창작의 대장정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재언 미술평론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