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 보도자료

<모더니즘적인 구조를 실현하는 미니어처> 고충환_미술평론가,2001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7. 13. 09:52

모더니즘적인 구조를 실현하는 미니어처

작가 김승희는 풍경을 주제로 한 금속 오브제 작업과 전래하는 민화로부터 차용한 소제의 표현으로써 금속공예의 표현 영역을 확대하는 일에 천착해왔다. 민화와 관련해서는 조선조 민화 중 특히 책거리 그림에서 확인되는 선과 면적인 구성, 그리고 여기에 부가된 다기茶器나 그릇류의 그림에서 모티브와 관련한 주요한 힌트를 얻고 있다. 이런 전통적인 소재를 특유의 기하학적 구성주의에 기초한 자신의 작업에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고 금속의 표면에 난 자연녹, 동록銅綠을 이용한 청색조나 갈색조의 다양한 채색 효과에 주력해왔다.

이렇듯 공예 고유의 기능성에 한정하기보다는 그 자체 시지각적인 쾌快를 유발하는 순수 조형ㅈ거 대상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했으며, 그리고 동시대적인 표현에서 나아가 자생성의 가능성을 꾀하거나, 무엇보다도 자연친화적인 작업을 실천했다. 이런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가 허가를 받아 제 6회 석주미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995년 박여숙 화랑에서 수상전). 한편으로는 공예 전문화랑 크래프트하우스를 개관하여 일선에서 공예의 유통과 저변 확대에도 일정한 역할을 기울이고 있다.

작가의 작업이 갖는 풍경으로서의 특성은 한눈에도 기능성보다는 조형적 감각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작업과 함께 실제로 풍경을 언급하고 있는 일련의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이를테면, 그의 작업은 식물의 잎과 난초 등의 자연이나 화병 등의 일상으로부터 소재를 취하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가 하면, 옆으로 길게 누운 풀잎에는 바람도 분다. 이 모든 소재들이 사실적인 묘사의 직접적인 재현으로서보다는 반쯤은 추상화된 기하학적 형상을 얻고 있으며,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한 편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풍경의 여상과 시정詩情 탓에 그의 작업은 흔히 ‘금속으로 만든 그림’이나 한 폭의 ‘정물화’, ‘시적 정념을 내재한 풍경’이라는 형용어로 수식된다.

특히 ‘금속으로 만든 그림’이란 말은 다름 아닌 금속을 조형하는 프로세스를 지시하며, 금속이라는 소재적 성질만 다를 뿐 그 습성이 여타의 회화적인 프로세스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금속조형이건 회화적 프로세스이건 소재의 물질적인 조선에 반영되기 마련인 조형적인 제 조건이 그림 곧 형상으로 귀결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회화적 프로세스가 삶의 현장성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갖는 자족적인 원리에 기울어져 있음에 반해, 금속조형은 삶의 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그 당위성을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렇듯 삶의 터로부터 유쾌한 금속조형 특유의 미덕은 아마도 기능성이나 효용성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런 저가의 사정은 공예 고유의 가능성을, 그리고 기능성과 조형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율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공예를 크래프트로 볼 것인가 혹은 아트로 범주화 할 것인가에 대한 오래되고 민감한 문제의식을 제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기능성 자체를 생활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쓰임새 곧 실용성에만 한정하기보다는, 조형적인 산물에 해당하는 미적 행수의 대상으로서도 이해한다. 그러니까, 벽에 걸리거나 일정한 생활공간을 점유한 그림이나 조각이 그렇듯이 공예에서의 기능성과 조형성 또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기능성이나 효용성의 이해가 조형성의 상대적인 결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금속조형이 요구하는 미적 감수성을 기능주의의 그것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금속조형이 장식적인 감각 -그 자체 본질적이기보다는 잉여적인-을 요구하는 것임에 반해, 기능주의 - 미니멀리즘적인 절제의 미학에 기초한 -에서 장신은 가능한 배제되어야 할 불 필요한 조건으로 인식된다는 표면적인 차이를 제외한다면, 금속조형이건 기능주의이건 특유의 조형적 성과는 다름 아닌 이런 기능성이나 효용성에의 천착으로부터 유래한다.

결국 금속조형에서 기능성과 효용성은 조형적인 미적 감수성과 분리되지 않은,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서 상호 간 내재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일각에서는 제기되고 있지 않는다는 기능성 - 단순한 장신구나 생활용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 조형성 - 삶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순수한 조형적 별반 다르지 않다는 - 간의 논쟁은 보기에 따라서 이분법적인 관념의 습성에 기울어진 점이 없지 않다. 더불어 기능성과 효용성이 삶/자연/세계의 습성에 바탕을 둔 것인 만큼 삷/자연/세계의 습성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삶의 슴성이 변모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시대가 요구하는 미적 감수성에 대해 열려있어야 한다. 이런 전제하에서 기능성과 조형성 논의는 비로소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런 기능성과 조형성 간의 일체과 조화는 정작 현대보다는 전통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예컨대 장신구든 생활용구든 정해는 기물에서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서 소유욕을 자극하니 않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 진정한 실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규방문화 생활사의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원석류와 금속류의 전통적인 장신구에서는, 그 소재의 표현에 있어서 현대공예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의 모든, 나아가 그 이상의 조형적인 성과를 해볼 수 있다. 즉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꾀한 정치情致한것부터 대상을 일정하게 추상화시킨 문양류 그리거 아예 어떠한 실재하는 대상도 참조하지 않은 순전히 추상적이고 조형적이 접근을 꾀한것, 즉 순수 기하학적 형태를 염두에 둔 형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 영역을 가시화하고 있다.

근작에서 작가는 이전의 금속조형에다가 루비나 마노, 황옥과 수정 등의 원석류의 도입한 미니어처를 시도하고 있다. ‘투명한 공간’,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이란 제목을 단 일련의 작업들에서 이전의 자연친화적인 풍경으로부터 인간의 관계로 변호k된 관심이 읽혀진다. 선과 면의 최소한의 조형적인 조건으로써 조화와 대비 효과를 꾀한 점이 미니멀리즘 특유의 절제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순전한 형식적 관점에 경도돼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급적 소재 소유의 물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미학과의 친근감이 확인된다.

그런가 하면, 원석류에서는 가공한 면과 가공하지 않은 채 자연 상태를 유지한 면과의 대비 효과가 특징적이며, 인공적으로 원성을 가공하기보다는 가급적 자연 상태를 보존하려는 태도에서는 자연주의의 일면이 엿보인다. 내부에 화석을 포함하고 있는 원석들에서는 원석 고유의 투명한 소재에 비치는 아름다움을 더한다. 또한 수많은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생생하게 공유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그 자체 영원선을 상기시키는 시간의 지층을 보는 듯하다.

이렇듯이 작가의 귽가을 지배하는 미학적 토대는 대략 미니멀리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자연주의가 근간이 되고 있다. 여기에 미니어처에 반영된 미시적 세계에 대한 특유의 감성이 부가됨으로써 가급적 장식성이 배제된, 최소한의 조형적인 조선으로서의 ‘구조적 성질’을 실현한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