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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보도자료

크래프트 하우스_미술공예운동을 꿈꾸다


Craft House_Dreaming of Arts and Crafts Movement
Passionate endeavors to popularize craft is evident with the establishment of Craft House.

김승희는 젊은 시절부터 '예술의 민주화, 수공예의 가치제고, 자연의 회복'등 모리스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금사랑 개점 이후 지난 30여 년간 미술공예운동의 이상을 향해 사회적 실천을 지속해왔다.
사실 공방이나 샵의 운영만큼 힘든 일도 없다. 사람이 그 공간을 운연하는 것이고, 사람들 만나는 일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금속공예가 김승희는 그 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한 미술공예운동에 대한 열정과 꿈이 있었기에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해 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예술 민주화의 사랑방

1861년, 영국의 27살 청년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런던의 레드 라이온 스퀘어 Red Lion Square에 친구 마샨, 포크너와 함께 수공예 및 장식품 전시 판매장(Morris, Marchall, Faulkner&Company)을 낸다. 이것은 후일 미술공예운동 Arts and Crafts Movement의 사회적 실천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김승희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국민대에서 금속공예 전공 교수로 부임한 후, 1978년 유리지와 함께 인사동에 낸 금속공예 공방이 바로 '금사랑'이었다. '금속공예가 있는 사랑채'라는 이 아름다운 이름의 공간은 1981년 문 닫을 때까지 한국 전통의 미를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명소였다.


1994년 구기동에 설립한 ‘크래프트하우스’는 ‘공예의 집’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김승희의 미술공예운동에 대한 의지를 말없이 증거하는 역사적 산실이다. 미술사의 언덕의 한편, 영국에서 시작된 미술공예운동의 주창자 윌리엄 모리스가 켄트 주에 땅을 마련하고 건축가 필립 웹Philip Web에게 설계를 의뢰해 1859년 완성된 신혼집의 이름이 ‘레드 하우스Red House’였다. 당시로서는 현대적으로 번안된 중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이 집이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이 집에는, 모리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식물문양의 벽지, 카펫, 패브릭으로 장식된 140여 년 전 역사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다. 김승희는 바로 ‘레드하우스’에 깃들어 있는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이념을 이 땅에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승희는 젊은 시절부터 ‘예술의 민주화, 수공예의 가치제고, 자연의 회복’등 모리스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금사랑 개점 이후 지난 30여 년간 미술공예운동의 이상을 향해 사회적 실천을 지속해왔다. 사실 공방이나 샵의 운영만큼 힘든 일도 없다. 사람이 그 공간을 운영하는 것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금속공예가 김승희는 그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한 미술 공예운동에 대한 열정과 꿈이 있었기에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해 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생활 속의 예술을 전파하는 사랑채 같은 장소로서 크래프트하우스를 1997년 압구정동으로 이전한 뒤에도 그의 미술공예운동에 관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씨앗들이 10년을 지나면서 더욱 싱싱하게 자란 그의 실천적 의지를 더 강화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1993년 집을 위한 금속공예전 포스터

김승희의 미술공예운동을 향한 열망의 언덕에는 늘 다른 사람과의 합창곡이 동반된다. 미술공예운동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님을, 그래서도 안 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실천의 사례는 우리 시선을 매혹하기에 충분한다.
1993년 그가 회장으로 있던 서울금속공예회의 정기 회원전을 <집을 위한 금속공예전>(갤러리아 미술과)으로 열었다. 당시 금속공예계의 조류에서 볼 때, 전시 위주의 작품전시에서 벗어나 주거 공간을 대상으로 한 주제전은 획기적인 기획이 아닐 수 없었다. 현관, 거실, 주방, 침실 등 회원 각자가 원하는 주거 공간을 위한 금속공예품을 제작했고, 금속공예가만을 위한 잔치가 되지 않도록 많은 이가 드나드는 백화점 미술관에서 개최했다. 이 회원전은 같은 전시제목으로 199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주거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치밀한 연출하에 출품작의 사진 촬영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도록, 포스터, 디스플레이 등 모든 면에서 금속공예의 위상을 한 차원 격상시켰다. 바로 그 전시를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이가 바로 김승희다. 미술공예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선배와 동료, 후배와 제자 등으로 이어져야 함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 시기 철로 제작한 김승희의 소파는 그 대담한 철판의 구성적 관계, 부식기법을 이용한 자연스런 펴면 처리, 나뭇잎 문양이 들어간 패브릭과의 조화 등 새로운 모리스 양식의 탄생을 목격하는 등 관객의 시선을 흔들어 놓은 역작으러 회자되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4년, 구기동 크래프트하우스 개관전으로 열렸던 <생활의 기쁨>전은 김승희의 미술공예운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명료한 깃발이었다. 한 신문에서는 크래프트하우스의 개관을 “‘생활 속의 공예’로의 전환”이라는 표제하에 그 지향점을 명확한 어조로 대중에게 전파했다. 자신을 비롯, 김재영, 홍정실, 우진순 4명의 금속공예가를 초대하여 진통미와 현대적 조형 감각이 공존하는, 작지만 의미있는실내 풍경을 선사했다. 이후 연중 이어지는 크래프트하우스의 기획전은 대중의 관심을 끌어가는 참신함을 잃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기념일을 위한 오브제전> 시리즈가 중요한 기획전으로 각인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념일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규정하는 다른 이름이듯, 수없이 많은 예술, 공예 파생물이 가능한 기획 아이템이기 때문이었다. <트로피와 상패(1996.11)>, <액자와 촛대(1996.12)>, <반지(1997.2)>, <문방구(1997.4)>, <향로(1997.6)>로 이어지면서 금속공예가는 물로 일반인들까지도 다시금 기념일을 생각하게 하는 특별한 기획으로 아로 새겨졌다. 공예가 대중 속으로, 대중을 향해 물결쳐 들어가면서 이 기획전은, 김승희가 스스로 술회하는 듯 미술공예운동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주 특별한 돋보기 Ⅰ,Ⅱ>(2002.5, 2003.5)전 역시 김승희의 시대를 읽는 탁월한 기획력과 창작자인 공예가와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져 대중의 호평을 받은 전시였다. 크래프트하우스 기획전에는 감각적인 제목과 기획 그리고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그 무엇이 있었다. <아름다운 시계>(2003.10), <여름무지개-유리와 모시공예>(2004.7), <사랑의 시가 담신 커플 반지>(2004.10), <7월의 무지개-유리공예와 구슬목걸이>(2005.7)전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마치 영화 같은 영상미를 동반해 한번쯤 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 2004년12월 오픈한 소연 매장



2004년 12월, 인사동에 공예거리인 쌈지길이 열리면서 김승희의 장신구 브랜드 ‘소연小然'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작은 자연’이라는 뜻이 시사하듯 그의 장신구들은 또 다른 그의 미술공예운동 이념을 전파하는 전도사로서 이름을 얻게 된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일을 이룬다’는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은, 그의 미술공예운동의 정점을 철학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하나의 물방울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는 것처럼 금속공예가 김승희의 장신구는 작지만 큰 소망을 품은 씨앗인 셈이다. 예술 장신구, 혼례용 공예품, 문화상품까지 아우르는 소연의 상품은 상업적 상품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김승희의 영혼과 정신이 배어있는 상품이며, 그의 예술적 성과가 집약된 결정이며,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예술의 무게를 담은 소품이다. 식물문양의 독특한 변주들이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을 사회적으로 전파하는 묵시적 전령이었던 것처럼, 소연은 이제, 김승희의 미술공예운동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작은 자연이 되고 잇다. 우리는 당대의 전통이 되어가는 김승희가 꿈꾸는 미술공예운동의 언더에 서서 다음 악장의 음률들을 기다리게 된다.

1994년 구기동에 설립한 크래프트하우스